윤 정부, 미래 위한 건전재정? 오늘 하던 연구도 못할 판
“정부의 재정 운용 기조는 건전재정으로서 미래세대에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넘겨주지 않기 위한 것이다.”(윤석열 대통령의 2023년 10월31일 국회 시정연설)
“알앤디(R&D·연구개발) 예산이 삭감됐고, 청년 예산이 대폭 줄었으며, 기후위기와 인구구조 변화에 대비한 예산은 충분히 담기지 않아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예산이다.”(같은 날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2024년도 예산 약 650조원을 두고 국회에서 예산 레이스가 시작됐다. 윤 대통령은 재정건전성과 함께 약자복지를 내세워 예산 편성 정당성을 강조하지만 민주당은 연구개발 예산 삭감 등 정부 예산이 부실하다고 맞선다.
2.8%… 역대 최저치 증가
정부는 2024년 예산을 656조9천억원으로 책정했다. 2022년 국회에 제출해 확정된 본예산 638조7천억원에 비하면 2.8% 증가하는 데 그쳤다. 재정 통계가 정비된 2005년 이후 역대 최저다. 문재인 정부 마지막 해인 2021년 정부의 총지출(결산 기준) 682조4천억원에 비하면 3.7% 줄었다. 2022년 소비자물가 상승률 5.1%에, 2023년엔 3%를 웃돌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을 고려하면 정부 총지출의 실질증가율 감소는 더욱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정부 지출 증가율이 크게 꺾인 데는 재정건전성과 함께 ‘부자 감세’로 대표되는 세수 감소 영향도 있다. 정부는 2023년 국세수입을 애초 400조5천억원으로 예상했다가 2023년 9월 59조1천억원이 줄어든 341조4천억원으로 수정했다. 경기 부진 탓도 크지만 법인세율 인하(과표구간별 1%포인트)와 종합부동산세율 인하, 다주택자 중과 폐지 등에 따른 세수 감소 영향이 만만치 않았다는 평가다. 2024년엔 367조4천억원으로 애초 예상한 2023년 수입보다 33조1천억원(-8.3%) 줄고, 수정치보단 26조원(7.6%)이 늘 것으로 예상했다. 소득세, 상속세 등은 2023년(수정치 기준)보다 늘지만 법인세는 79조6천억원에서 77조7천억원으로 2.5%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더 줄어들 가능성도 크다. 정부는 2024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2.4%로 국회예산정책처(2.0%), 국제통화기금(IMF·2.2%)보다 높게 잡았다. 성장률이 높을수록 경기가 좋아 세금도 많아지는데 다른 기관들은 2024년 경기를 정부보다 좋지 않다고 본 것이다. 국회예정처는 정부 전망보다 6조원 적게 세금이 걷힐 것으로 예상했다. 최근 5년 동안 실제 국세수입이 정부 예상과 판이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나마 국회예정처 전망이 결과치에 더 가까웠다.
이상민 나라살림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정부는 재정을 통해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해 공평한 분배, 안정적 경제성장을 추구해야 한다”며 “정부가 2024년 지출을 사실상 줄이면서 어려운 경제 상황을 이겨내록 하는 마중물 역할을 사실상 포기했다”고 말했다.
온라인 수학 환경 구축 등 28억원 들이고… 매몰비용만 발생
지역의 한 국립대병원은 의료용 3차원(D)프린터 주문을 취소했다. 시범적으로 환자 맞춤형 이식 관절을 개발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업체 관계자는 “‘2024년 관련 예산 자체가 사라져 구입할 수 없게 됐다’는 말을 들었다”며 “지역 의료체계 개선에 도움될 수 있는데도 예산이 줄어 진행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정부는 연구개발 예산을 33년 만에 전년보다 적게 편성했다. 아직 예산 심의가 국회에서 진행 중인데도 그 영향은 벌써 나타나고 있다. 2023년(31조1천억원)보다 16.6% 줄인 25조9천억원이 책정됐다. 이유는 윤석열 대통령이 6월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말한 ‘이권 카르텔’을 제외하곤 찾기 힘들 정도로 불투명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23년 3월 ‘국가 연구개발 중장기 투자전략’에서 2030년 과학기술 5대 강국 등을 목표로 2023∼2027년 170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2024년에는 2023년보다 9천억원이 늘어난 32조원을 계획했다. 하지만 6개월 뒤인 국가재정운용계획에서 같은 기간 145조7천억원으로 계획하면서 과기정통부 발표보다 24조8천억원이 줄었다. 2024년치도 6조1천억원 깎였다. 더욱이 감액 사유와 자세한 변동 내역 등도 공개하지 않았다. 국회예정처는 정부의 연구개발 예산 삭감에 “일관성이 떨어지고 세부 분야 재정지출 계획을 수립하지 않아 구체성이 결여돼 있다”고 비판했다.
연구개발은 짧게는 2∼3년, 길게는 5∼10년 이상이 소요되는데 수개월 만의 계획 변경은 현장에 큰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2022년 시작한 과기정통부의 온라인 수학·과학 가상실험 환경 구축 사업은 2023년까지 27억8천만원이 들어갔는데 2024년에 폐지하기로 하면서 제대로 된 효과도 보지 못한 채 매몰비용이 발생할 처지다. 2023년 시작한 중소벤처기업부의 연구장비 활용 바우처 지원사업, 중소기업 전략기술 연구조사 사업 등도 같은 처지다.
현장 연구개발 분야 종사자들의 반발은 거세다. 정부출연연구기관과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등 28개 기관이 참여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95.6%는 “연구비 삭감이 비효율을 개선하기 위한 구조조정이 아니다”라고 했고, 89.9%는 “집단행동 저항이 필요하다”고 했다. 호원경 서울대 명예교수는 “과학기술 경쟁력의 핵심인 다양성의 보고이자 근간을 이루는 기초연구사업도 예산이 삭감됐다”며 “연구 분야의 구조조정을 가져올 수 있는데 이는 기초연구 저변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윤석열 대통령은 “알앤디 예산은 미래 성장동력 창출을 위해 질적 개선과 지출 구조조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았다”며 “첨단 인공지능(AI) 디지털, 바이오, 양자, 우주, 차세대 원자력 등에 대한 알앤디 지원을 대폭 확대했다”고 말했다. 다만 “지출 조정 과정에서 제기되는 고용 불안 등 우려에 대해서는 정부가 꼼꼼하게 챙기고 보완책도 마련하겠다”며 일부 수정 가능성을 내비쳤다.
약자복지 한다고 보편복지 외면
정부는 2024년 예산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약자복지를 앞세웠다. 윤 대통령은 “경제가 어려울 때일수록 어려움을 더 크게 겪는 서민과 취약계층, 사회적 약자를 더욱 두텁게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기준 중위소득’ 상향에 따른 지원 확대다. 2024년 기준 중위소득을 6.09% 올린 데 이어 생계급여 대상을 중위소득 30%에서 32%로, 주거급여는 47%에서 48%로 확대했다. 받을 금액도, 대상도 많아진 셈이다. 또 장애인연금과 기초연금도 올랐고 노인 일자리도 20만 개 늘렸다. 구인회 서울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저소득층 지원은 문재인 정부에 비해 지원이 늘었고, 집권 초기와 달라 노인 일자리 사업 확대도 극심한 노인 빈곤과 빠른 고령화를 고려할 때 환영할 만하다”고 말했다. 이상민 수석연구위원은 “지원 확대는 바람직하지만 높은 물가상승률과 정부가 약자복지를 강조한 점을 감안하면 인상폭은 아쉽다”고 말했다.
특히 윤 대통령이 서민·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보편복지에선 후행한다는 비판이 나온다. 구직(실업)급여 예산이나 상병수당 시범사업 예산이 줄어든 것이 대표적이다. 2024년 실업급여 예산은 10조9144억원으로, 상병수당 예산은 146억원으로 각각 2695억원(2.4%), 58억원(28.5%) 적게 편성됐다. 지역거점병원 공공성 강화 사업 예산(1416억원)도 6.3% 줄어드는 등 군데군데 복지 예산 축소가 발생했다. 구인회 교수는 “약자복지란 말에는 약자가 아닌 중산층이나 서민을 대상으로 한 복지는 삭감하겠다는 뜻을 가질 수 있다”며 “코로나19로 양극화가 심해졌고 정부는 부자 감세마저 한 상황에서 중산층을 포함한 서민 대상 지원 대책은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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