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슬기의 언더뷰] "그냥 미미하게 살면 된다" 정보라 작가가 말하는 삶과 소설
[장슬기의 언더뷰] 작가 정보라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삶이 고통의 바다라서…” 지난 8월 장편소설 <고통에 관하여>를 출간한 정보라 작가는 고통에 천착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소설만이 아니다. 박사논문 1장 제목도 '고통과 괴로움'이다.
고통은 인류의 오랜 관심사다. 살아있는 이들만 고통을 느낄 수 있기에 고통은 삶과 죽음을 구별하는 기준이자 삶의 본질인지도 모른다고 정보라 작가는 소설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모두가 겪는다고 해도 고통을 타인과 공유하긴 만만치 않다. 고통은 저마다 고유하고, 타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그저 상대방의 고통에 다가가려는 노력일 것이다. 끝끝내 그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는 없지만 말이다.
정보라 작가는 글만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도 다른 사람의 고통에 다가간다. 그의 취미는 데모(집회)다. 고통받는 사회적 약자들 근처에 머무르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부당하게 착취당하다 내쫓기는 소식을 뉴스로만 접하면 그저 안타까운 남의 이야기지만 현장에 찾아 함께 호흡하면 더는 남의 얘기일 수 없게 된다. 또한 대학 시간강사로 일하던 정보라 작가는 연세대를 상대로 퇴직금과 각종 수당을 지급하라는 소송 중이다. 수많은 강사가 같은 문제로 투쟁 중이니 이 소송은 개인의 싸움이자 여러 강사와의 연대이기도 하다.
“언제나 미미한 작가였다”라고 자신을 설명한 정보라 작가는 2022년 소설집 <저주토끼>로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 인터내셔널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됐다. 그리고 올해 10월 초 같은 작품으로 전미도서상 번역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다. 한국 작가로선 처음이다. 당장 10월 하순부터 폴란드에서 열리는 초청행사에 참여했다가 전미도서상을 심사하는 미국으로 직행한다는 그는 “해외 일정 때문에 이태원참사 관련 집회에 갈 수 없다”고 못내 안타까워했다. 그와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재구성했다.
왜 오랜 시간 '고통'이란 주제에 관심을 보였나?
“삶이 고통의 바다라서 그렇다. 내가 전공한 러시아 혁명기 유토피아 소설은 대부분 고통에서 시작한다. 세상이 이렇게 고통스러우니 혁명을 통해 유토피아를 만들자는 이야기다. 그게 와 닿았다. 고통은 남이 대신 겪어줄 수도 없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언어도 없으니 남한테 전달할 수 없다. '고통은 쾌락의 반대말인가. 그러면 고통이 없는 상태가 쾌락인가. 고통도 쾌락도 없는 상태는 무엇이냐' 등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작품을 통해 '의미 없는 고통을 거부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는데, 사실 의미 없는 고통과 의미 있는 고통을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사람마다 삶은 굉장히 다양하다. 무엇보다 미래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당장은 모른다. 그래도 선한 사람들 여럿에게 물어보면 대략 답이 나올 것 같다. 그리고 다들 '그 직장을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말할 때 좀 쉴 수 있으면 좋겠다. 일을 그만두면 실업급여가 제대로 나오고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갈 수 있어야 마음 편하게 쉼을 선택할 수 있다.”
작품마다 자유로운 상상이 돋보이는데 소재는 어떻게 구상하나? 글이 안 써질 때는 어떻게 하나?
“습관적으로 모든 순간에 작품 소재를 구상한다. 글이 안 써질 때는 일단 잠을 자면 많이 나아진다. 또 소재만 잡아놓고 나도 모르는 소리를 쓸 때가 있는데 장르문학 작가이다 보니 그럴 때는 소재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연구논문들을 본다. 그래도 안 되면 설거지를 한다. 설거지로도 안 되면 빨래를 하고 최후의 수단으로는 청소기를 돌린다(웃음). 그리고 데모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데모하러 가면 특이한 분들도 많고 돌발상황도 계속 생기니까. 행진하고 서명받고 1인시위를 하면 소설 구상이 잘 된다.”
사회적인 사건이나 이슈와 연관된 소재를 많이 다루다 보니 작품들이 '현실밀착형 SF', '사회비판적 호러'라고도 불린다.
“내 삶이 굉장히 협소하다. 직장을 다니긴 했지만 대학 강사는 좀 특수한 생활이지 않나. 또 결혼을 아주 늦게 했고 임신·출산·육아의 경험도 없다. 그러면 작품 소재를 찾거나 구상할 때 눈을 바깥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대신 겪을 수 없는 남의 고통을 읽어내야 하는 작업인데, 특히 여러 사람이 고통받은 실제 사건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면 부담스럽지 않나?
“그래서 장르문학이 좋다. 이야기 중에 외계인이나 흡혈귀가 등장하면 독자들이 그 사건인 걸 잘 모르게 된다. 그래서 사건 당사자들에게 2차 가해 등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더 안전하게 할 수 있다. 간신히 평온하게 사는 분들을 다시 소환해서 고통받게 할 수도 있는데, '그래서 흡혈귀가 되었다'고 쓰면 사람들이 그냥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또 그 사건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안다.”
한국 사회는 세계적인 상에 관심이 많다. 정 작가도 <저주토끼>가 부커상 후보에 오르며 큰 주목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보나?
“체력적으로 매우 힘들다. 생각만 해도 비행기 멀미가 나서 토할 것 같다. 올해도 3월에 스페인 갔다가 4월에는 프랑스와 콜롬비아에 다녀오고 5월에는 호주에 가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기 때문에 상공을 피해서 가느라 비행시간이 늘었다. 진짜 러시아를 규탄한다(웃음). 그래도 운 좋게 내가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대표가 됐을 때 후보에 올랐다. 장르문학을 위해서는 잘 됐다고 생각한다. 대표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고 다른 작가들도 강연을 더 하거나 지면이 늘어나는 등 현실적으로 기회가 늘었다.”
세계적인 상엔 관심이 많은데 정작 문학이나 출판 환경은 굉장히 어렵다. 특히 올해는 작은도서관이나 각종 도서 출판 지원 예산도 크게 줄거나 삭감됐다.
“작은도서관은 물론 독립서점의 문화행사 예산도 다 삭감됐다. 지역 독립서점 한 달 매출이 50만 원인데, 서울 아닌 곳에서는 작가 한 명 모시려면 KTX 타는 교통비만 10만 원이고 강연료에 식사비·원고료까지 50만 원은 들어간다. 정부 지원이 없으면 지역 시민들은 그냥 '취업 뽀개기' 같은 책만 읽게 된다. 그런 면에서 이런 예산 삭감은 지역 차별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상것'들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던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리고 사실 작은도서관은 박정희 정권 시절 새마을문고에서 시작됐다. 정부가 지금 새마을정신을 모욕하는 거다(웃음).”
작가로서도 이런 상황을 체감하나?
“올해가 한국-캐나다 수교 60주년이라 내년에 합동 단편집을 내기로 했다. 그런데 그 예산이 다 사라졌다. 캐나다 대사관에서 전폭 지원을 해줘서 단편집이 일단 나오긴 하겠지만 문화외교 측면에서 좋은 프로젝트인데 캐나다에만 의존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또 원래 내년 9~10월경 캐나다 토론토 문학축제와 한국 와우북페스티발에 양국 작가들을 교환 초청할 생각이었는데 와우북 페스티벌에 대한 정부 지원 예산이 없어졌다. 사업이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겠다.
또 해외 출판사에 대한 지원도 없어졌다. 해외에서 한국 장르문학을 출판하는 건 모두 독립출판사들이다. 남미 지역에서 한류에 대한 관심이 크다. 지난 3월 콜롬비아 출판사에서 <씨앗>이라는 제목으로 내 단편집이 나왔는데, 출간 행사에 가보니 독자들이 구름같이 몰려왔다. 그런데 이 출판사는 고작 3명이 운영하는 곳이다. 규모가 작은 곳에 대해서는 지원을 안 하려 하는데, 이런 예산을 깎으면 한국 문학 수출에 지장이 생긴다.”
과거 정부에서 블랙리스트에 연루된 인사들도 다시 곳곳에 등장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 침해에 대한 두려움을 실제로 느끼고 있나?
“당연하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좀 두고 봐야겠지만 이미 한번 겪었던 일이지 않나. 정부가 만약에 블랙리스트를 만들면 내가 여러 나라에 가서 여러 나라의 말로 한국 상황을 알려줄 거다.”
최근 SF 등 장르문학 독자들이 많아졌고 동시에 페미니즘·장애학 등 소재도 다양해졌다. 왜 이러한 흐름이 생겼다고 보는가?
“장르문학은 등단 시스템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원래부터 소외된 분야였고 작가가 돼도 딱히 얻을 게 없기 때문에 비장애인·이성애자·남성 등의 특권층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고 다양성이 침해받지 않을 수 있었다. 또 작품이 온라인에서 발표되고 읽히기 때문에 성별·장애 등과 상관없이 익명으로 글을 쓰고 선택받을 수 있다. 그렇게 해서 데뷔하는 작가가 많아지고 이제는 수준 높은 SF문학상도 늘고 있다.
다만 장르문학은 상업성이 강하고 독자 반응이 실시간으로 받다 보니 앞으로 작품들이 획일화될 우려는 있다. 또 나중에 장르문학 내 권력이 생긴다면 아마 기존의 문단 권력과는 좀 다른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작품들이 팔리기 시작하면 권력화하려는 무리는 늘 나타나니까 주의해야지. 내가 20년 뒤에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누가 깃발 들고 와서 나를 규탄해줘야 한다(웃음).”
최근 몇 년간 강사를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되었고 포항으로 이사도 갔고 《저주토끼》로 많은 주목을 받는 등 여러 변화가 있었다. 글을 쓰는 무게감이 달라졌을 듯하다.
“(부커상 최종 후보가 되어) 영국 다녀온 다음에는 '이게 <저주토끼>하고 비슷한가? 더 잘 썼나, 더 못 썼나?' 하는 생각을 계속해서 글을 잘 쓸 수가 없던 시기가 좀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안 팔리는 작가였고 <저주토끼>도 처음에는 팔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학교 행정실에 강사 이외의 소설과 번역 수입에 대한 서류를 냈더니 액수가 너무 미미하다고 신고할 필요가 없다고 하더라(웃음). 그래서 '내가 언제 위대했나'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경제적으로 망해도 상관없고, 항상 미미했기 때문에 그냥 미미하게 살면 된다. 그러면 될 것 같다. 그리고 이사 간 뒤에 포항을 배경으로 하는 해양수산물 시리즈를 써서 내년에 책이 나올 것 같다. 남편과 시어머니가 등장하는데, 남편이 책 언제 나오냐고 몹시 기다리고 있다(웃음).”
강사로 일했던 연세대학교를 상대로 퇴직금과 주휴·연차수당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는데 어떻게 되고 있나?
“1년3개월 됐는데 아직 진행 중이다. 판사님이 다툼의 여지 없이 깔끔하게 판결 내고 싶다고 하셨는데, 감사한 일이지만 기간이 길어지고 있어서 힘들다. 다른 대학에서도 같은 문제로 동시다발적으로 소송 중인데 전망을 모르겠다. 그런데 전망이 있든 없든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서 다 같이 가야 한다. 잘 버텨야 할 것 같고 다른 강사들도 잘 버텼으면 좋겠다. 이 말은 인터뷰에 꼭 써달라.”
취미가 데모인데, 글 쓰면서 회 현안에 관심 갖는 일이 피곤하진 않은가?
“뉴스로만 보면 남의 얘기라서 피곤하다. 포항에 살다 보니 지역의 장기투쟁 사업장 문제에 관심이 생겼다. 가서 사정을 알게 되고 열받기 시작하니까 그때부터는 피곤하지 않다. 농성하는 노동자들 잘 지내는지 보고 싶다. 이번에 출국하면 한 달 뒤에나 갈 수 있어서 엊그제 현장에 다녀왔다. 내가 귀국하기 전에 다 복직해서 노동자들이 '이제 일하느라 바쁘니까 오지 말라'고 하면 좋겠다.”
※ 이 인터뷰는 장슬기 미디어오늘 기자가 참여연대 월간 매거진 '참여사회' 인터뷰어로 참여해 작성한 기사입니다. 참여사회 2023년 11월호(통권 310호)에 실렸습니다. 인터뷰 전문은 미디어오늘과 참여연대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인터뷰 인용 시 '참여사회' 표기를 부탁드립니다. ▷참여연대 홈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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