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따라 깊어가는 영산강의 가을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꿈결 같은 영산강 비경 즐기는 식영정/희미한 옛 추억 담긴 몽탄포구에 ‘낭만 코스모스’/무안갯벌3000년 시간과 생명 꿈틀대
두 바퀴로 강변을 달린다. 따사로운 햇살과 시원한 남도의 가을바람 맞으며. 갈대와 억새, 단풍이 물든 작은 산들까지 어머니 품처럼 넉넉하게 품어주는 호남의 젖줄. 300리 물길 굽이치며 흐르다 하구로 갈수록 아버지 품처럼 무한대로 커지는 영산강. 한들한들 코스모스 지천으로 핀 강따라 남도의 가을이 깊어간다.
◆꿈결 같은 영산강 비경 즐기는 식영정
전남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 북쪽 용흥사 계곡에서 발원한 영산강은 약 136㎞를 달려 장성, 광주, 나주, 영암, 무안을 거쳐 영산강 하굿둑을 통해 목포 앞바다로 흘러든다. 그런 넉넉한 강의 아름다움을 시원하게 즐기는 방법이 영산강 자전거길 라이딩이다. 영산강 하굿둑∼몽탄대교∼느러지전망대∼죽산보∼나주 시내∼승촌보∼광주시내∼담양읍내∼메타세쿼이아길∼담양댐으로 이어지며 총 133㎞로 약 9시간 정도 걸린다.
그중 영산강 하굿둑을 거느린 무안은 자전거길의 출발점이자 종착지. 몽탄대교를 지나면 영산강 제2경 몽탄노적(夢灘蘆笛)을 만난다. 영산강은 지역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른데 무안에선 몽탄강이라 부른다. 몽탄노적은 ‘꿈결 같은 여울에 울려 퍼지는 풀피리 소리’라는 뜻. 얼마나 경치가 빼어나면 묵객들이 이런 예쁜 이름을 붙였을까.
몽탄면 이산리 식영정에 오르면 몽탄노적이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게 된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아담하게 선 고풍스러운 정자 마루에 앉아 자연의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불어오는 잔잔한 가을바람에 사각거리는 나뭇잎 소리. 아무 근심걱정 없다는 듯, 여유 있게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그리고 눈앞으로 유유히 흐르는 영산강까지. 멍하니 앉아 풍경을 즐기다 보면 어디선가 꿈결 같은 풀피리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현판에 적힌 ‘연비어약(鳶飛魚躍)’은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뜻. 과거 선비들도 이곳에 앉아 생동감 넘치는 자연을 즐겼나 보다. 정자를 에워싼 노거수들이 눈길을 끈다. 500살을 훌쩍 넘은 둘레 3.2m 푸조나무와 둘레 3.4m 팽나무가 지금도 푸른 잎을 무성하게 피워 그늘을 만드니 대단한 생명력이다.
한때 영산강을 따라 이런 정자 530여개가 있었단다. 조선시대에 선비들이 반대파에게 참혹한 화를 당하는 여러 사화(士禍)가 터지자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으로 내려와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식영정도 세상이 불러도 귀를 막고 나를 가두던 선비들의 사연을 지녔다. 1630년 무안에 자리 잡은 한호 임연 선생이 강학을 위해 지은 식영정은 빼어난 영산강의 경치 덕분에 많은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아 문학을 논하던 경연장이었다.
정자 건립과 관련된 자료는 1643년 임연이 지은 복거록에 자세히 기록됐다. 그는 ‘영산강 연안을 따라 살 만한 곳을 찾아 상하를 두루 살펴보다 드디어 사포와 몽탄 사이에 한 오묘한 곳을 얻었으니 자리는 그윽하여 기운이 머물고 물맛이 좋으며 땅은 비옥하여 가히 선비가 살 만한 곳이다’라고 적었을 정도니 아름다운 풍경에 흠뻑 빠진 것 같다. 조선시대에 이산리는 마을 앞까지 물이 들어왔다고 하니 정자가 처음 지어질 때는 훨씬 풍경이 빼어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1900년대 초 화재로 소실돼 1983년 현재 위치에 복원된 식영정은 일자형 건축에 정면 3칸, 측면 3칸, 단층구조에 팔작기와지붕을 얹었다. 정자로서는 독특하게 제실을 갖춘 점이 눈에 띈다.
◆희미한 포구의 옛 추억 그리고 코스모스
식영정을 내려서면 ‘영산강 제2경 몽탄노적’이라 적힌 커다란 표지석 뒤로 포구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바로 한때 영산강의 번성을 주도했던 몽탄포구다. 몽탄은 영산강 가장 안쪽의 어항으로 하굿둑이 축조되기 전까지는 많은 어선이 어업활동을 했다. 특히 건너편 나주 동강면 주민들이 몽탄면 명산리의 호남선 명산역을 이용하려면 강을 건너야 했기에 1986년까지 동력선 나룻배가 운행됐고 하루에 500여명이 이용했을 정도로 북적댔다. 하지만 1994년 몽탄대교 준공으로 나루 기능이 사라졌고 지금은 고기잡이배 몇 척만 포구에 쓸쓸하게 남아 흘러간 옛이야기를 전한다.
표지석 옆으로 난 데크길로 접어들면 깊어가는 가을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게 된다. ‘소망의 숲’이라 적힌 안내문에는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조성된 수변생태공원이란 설명이 적혔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탄성이 쏟아진다. 빨강, 분홍, 하얀색 코스모스가 영산강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풍경은 예쁜 가을동화다. 코스모스 명소를 많이 다녀봤는데 아마 가장 넓고 긴 코스모스밭일 것 같다. 데크길을 따라 걷는다. 미세먼지 하나 없는 푸른 하늘은 가시거리를 무한대로 늘렸고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구름은 영산강에 그대로 담긴다. 여기에 바람따라 한들거리는 코스모스가 어우러지니 순정만화의 한 페이지를 보는 듯하다. 코스모스 사이로 걸어 들어간 연인들, 꼬마를 목에 태운 아빠, 다정하게 팔짱을 낀 백발의 노부부 모두 꽃보다 아름답다.
◆생명력 꿈틀대는 갯벌을 거닐다
갯벌처럼 꿈틀대는 생명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무안갯벌은 3000년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 면적 147.6㎢로 우리나라 갯벌 면적의 5.9%를 차지한다. 지금도 갯벌의 생성과 소멸 과정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칠면초, 강아지풀, 갯질경이 등 염생식물과 깃돌말목, 중심돌말목 같은 식물성 플랑크톤 등 다양한 갯벌생물이 서식한다. 또 이들을 먹이로 하는 조류 38종과 수산생물 36종, 저서동물 229종 등도 관찰되는 살아 숨 쉬는 갯벌이다. 이처럼 큰 가치를 지녀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과 해제면 일대 42㎢는 2001년 우리나라 연안습지보호지역 1호로 지정됐다. 2008년 지정된 갯벌도립공원 1호도 무안갯벌이다. 또 2008년 람사르습지 1732호로 등록됐다.
이런 무안습지가 요즘 아이들에게 자연을 호흡하며 갯벌의 소중함을 몸으로 느끼는 공간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무안군이 천혜의 갯벌자원을 보존하고 홍보하기 위해 2011년 무안생태갯벌센터를 열었고 2018년 무안황토갯벌랜드로 확장한 덕분에 다양한 생태체험학습과 해양환경교육의 메카로 활용되고 있다. 무안생태갯벌과학관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1층은 갯벌생물관, 갯벌탐구관, 갯벌미래관, 디지털 수족관, 다목적영상관, 스마트빌리지, 낙지어업유산관으로 구성됐고 2층은 힐링카페, 갯벌 키즈존, 전망대로 꾸몄다. 갯벌생물관 등에서는 갯벌의 생성원리와 생태환경, 무안 황토의 특징 등을 다양한 표본과 전시품으로 알기 쉽게 설명한다. 프로그램 체험실에선 농게 만들기, 하늘물고기 색칠하기, 낙지인형 만들기 등 다양한 미술체험을 즐길 수 있다.
2층 전망대로 올라서면 탁 트인 갯벌이 가슴을 시원하게 열어준다. 한쪽 집게발이 몸통만큼 큰 농게 조형물 뒤로 갯벌 위를 산책하는 데크가 놓였고 그 뒤 물이 빠진 갯벌이 광활하게 펼쳐졌다. 이런 소중한 자연이 한때 사라질 뻔한 위기에 처했었다. 갯벌을 쓸모없는 땅이라 여기던 1990년대 무안갯벌이 영산강 4단계 간척사업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다행히 주민들이 갯벌 지키기 운동을 펼쳐 1998년 취소를 끌어냈다니 참 고마울 따름이다.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일출전망대로 연결된 갯벌체험학습장을 만난다.
이곳은 멸종위기 야생동물 2급 흰발농게 집단서식지. 주로 갯벌 상부지역에 출현하는 흰발농게는 그만큼 무안갯벌이 청정하다는 점을 입증하지만 각종 개발과 채취로 멸종 위험에 직면해 있다.
즐길거리가 많다. 분재테마전시관도 마련됐고 해상안전체험관을 통해 각종 재난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도 익힐 수 있다. 해양생존, 인명보호, 선박사고 체험장과 심폐소생술실습장이 마련돼 있다. 오토캠핑장 38면도 갖춰 갯벌을 호흡하며 머리를 식히기 좋다. 황토움막(6인용), 황토이글루(4인용), 방갈로(3인용), 캐러밴(14대)도 마련돼 쾌적하게 휴식을 즐길 수 있다.
무안=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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