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한국은 독재 담론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박성철 하나세정치신학연구소 소장, 경희대 객원교수]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신자유주의는 인류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치 철학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의 부상은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년)의 사상에 대한 다양한 관심을 불러왔다. 특히 1927년 출간된 이후 서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 《정치적인 것의 개념》(Der Begriff des Politischen) 속 "동지와 적의 구분"(Unterscheidung von Freund und Feind)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변화한 세계를 정치적으로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80년대 이후 세계 정치는 더 이상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년)가 이해하였던 "국가의 운영 또는 이 운영의 영향"에 대한 문제로 제한될 수 없었다. 초국적 기업들의 등장은 세계화(globalization)를 촉진하였고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를 재정립할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일부 국가들에서는 정부가 앞장서서 이들 기업의 이권을 위해 과도하게 개입하였고 때로는 특정 지역의 분쟁과 전쟁을 부추기기도 했다. 하지만 공공선(public good)이나 공동의 이익(intérêt commun)을 중심으로 정치를 이해하려는 전통적인 시도들(존 로크나 장 자크 루소 등)은 이렇게 변화된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였다. 신자유주의의 부상과 관련하여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하였던 사상가들이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에 관심을 보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필자는 신자유주의의 몰락 이후에도 슈미트의 정치사상이 주의 깊게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슈미트의 독재 담론이 나치 독일(Nazi-Deutschland) 시대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었고 박정희의 유신헌법(1972년)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역사적 사실로 인해 필자의 견해에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는 슈미트가 남긴 비극의 유산을 부인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현대적 독재 체제를 정당화한 그의 독재 담론은 분명 비판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슈미트의 사상에 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는 한국 사회와 같이 민주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운영한 역사가 짧은 사회에서 왜곡된 신념 체계에 기반해 있는 슈미트의 독재 담론이 대중을 쉽게 사로잡기 때문이다.
슈미트의 정치철학은 결국 《독재론》(Die Diktatur, 1921년)과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 1922년)에서 출발한다. 그의 사상은 독일 현대사에 있어 가장 어두운 시절에 형성되었다. 1914년 그가 교수 자격을 취득했을 때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 뛰어들고 있었고 본(Bonn)에서 교수가 되어 《독재론》과 《정치신학》 그리고 《정치적인 것의 개념》으로 사회적 명성을 얻었을 때,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국이었던 바이마르 공화국(Weimarer Republik, 1919~1933년)은 미숙한 민주주의 체제로 인해 혼란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슈미트는 자신의 저서 《정치신학》에서 "주권자란 예외 상태를 결정하는 자"이며, "이 정의는 오로지 주권(Souveränität) 개념을 한계개념(Grenzbegriff)으로 생각할 때만 타당하다"고 주장하며 정치신학이라는 개념을 통해 정치와 종교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강조하였다. 물론 그 이유는 자신의 독재 담론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슈미트에 따르면, 종교적 영역에서 주권자로서의 하나님의 표상은 정치적 영역에서 주권자로서의 왕의 표상으로 전환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형성된 봉건제나 절대왕정은 결국 그 시대의 형이상학적인 세계상을 형성하였다. 슈미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주권자로서 하나님의 표상은 주권자로서 독재자의 표상을 통해서만 대체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근대의 등장과 함께 주권자로서 왕의 표상은 사라졌지만, 근대적 인간들은 종교적인 기반 위에서 형성된 주권자의 표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절차적 정당성이라는 이름으로 봉건 시대 주권자의 표상을 대체하려 했지만, 이는 종교적 주권자의 표상을 억누르고 있을 뿐 절대적 주권자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으며, 주권자로서 독재자가 등장할 때 비로소 이 욕망은 해소될 수 있다. 물론 슈미트는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하나님의 표상이 점차 약화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근대적 세속화 이후에도 과거와 같은 하나님의 표상이 필요한 이유에 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슈미트의 주장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치와 종교가 결탁했을 때 발생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잘 보여준다. 안정되고 불확실성이 감소한 사회에서 미래의 이상 사회(예: 천국)에 대한 신앙을 통해 현실을 부정하거나 단 하나의 극단적인 방법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망을 부추기는 종교는 외면받는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려는 이들이 늘어가고 사회가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질수록 그 병든 종교는 인기를 얻게 된다. 마찬가지로 강력한 신념 체계에 기반해 있는 슈미트의 독재 담론은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사회 구성원들이 받는 고통의 강도가 강할수록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한국 사회처럼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나라들은 미성숙한 민주주의 체제로 인해 사회적 문제와 정치적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들 가능성이 높기에 슈미트의 독재 담론이 대중을 쉽게 사로잡는다. 또한 한국 사회와 같이 극우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치와 종교가 쉽게 결탁하는 사회에서 슈미트의 독재 담론은 종교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지난 코로나 팬데믹 기간 과거 군사 독재를 찬양하며 공적 영역에서 반민주적인 행태를 보인 극우 기독교 세력의 행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필자는 슈미트의 정치철학에 관한 연구가 이러한 한국 사회의 현실에 기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슈미트의 독재 담론은 현실의 문제를 분석하는 효율적인 도구가 반드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윤석열 정권의 등장과 함께 역사적 퇴행과 사회·정치적 갈등이 심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슈미트의 사상은 현실 정치를 분석하는 도구와 독재의 정당화라는 불안한 평균대 위에 서 있는 양날의 검이다. 그렇지 않다면 슈미트의 담론은 언제라도 군사 독재의 악령을 불러낼 것이다.
(이 연재는 공공선 거버넌스(원장 강치원)에서 기획한 것입니다. 편집자)
[박성철 하나세정치신학연구소 소장, 경희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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