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기 위해 이 사회가 괜찮은지 묻는 사람 - 최인아 최인아책방 대표
왜 이 사람에게 주목할까
지금 들어도 기억이 나는 광고 문구를 쓴 유명한 카피라이터였고 30대 나이에 대기업 임원이 됐고 여성으로 숱한 최초 기록을 세웠다. 자기 발로 회사를 나온 뒤 책방을 열었고 잘 팔리는 책을 썼다. 올해에만 쉰 번 넘게 강연을 했고 강연 일정이 줄줄이 잡혀 있다. 자랑할 만한 이력이지만 그것만으로 이 사람의 존재감을 설명하기 어렵다.
승진하면 승진했다고, 회사를 그만두면 그만뒀다고 기사가 나왔다. 책방을 연다고, 책방을 열었다고, 책방 연 지 1년이 됐다고, 5년 됐다고 인터뷰를 한다. 올 8월 책방 개업 7년이 됐을 때도 어김없이 기사가 나왔다. 기사가 쏟아지는 것은 대중들이 이 사람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고 이 사람 역시 말할 수 있는 콘텐츠가 있다는 뜻이다.
지난달 25일 오후 약속한 것보다 한 시간 일찍 서울 강남구 선릉역에서 멀지 않은 '최인아책방'에 도착했다. 책방은 선릉역 부근 대로변에 있지만 그 앞을 두 번이나 지나쳤다. 길치인 데다 초행길인 탓도 있지만 책방을 알려주는 간판이 작아도 너무 작았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책방 간판이 아닐까 싶었다. 건물 1층이 아닌 4층에 있고 엘리베이터를 타야 갈 수 있으니 길을 가다 우연히 들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여기에 오려면 이 정도의 수고는 감수하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책방은 70평 남짓인데 천장이 높아서 훨씬 넓고 훤해 보였다. 화려하고 커다란 샹들리에나 그랜드 피아노 등이 눈에 띄었지만 이 책방을 두고 들었던 온갖 수식어에 비하면 수수했다. 책방 곳곳에서 사람의 손길이 느껴졌다. 책의 선정과 분류, 진열과 배치에 공을 들인 게 한눈에 보였다. 서가에서 책을 꺼내 들었다가 다시 꽂을 때도 아무렇게나 꽂아서는 안 될 거 같았다.
'미스 최'에서 '최인아 부사장'까지
화장기 없는 얼굴이 맑았다. 낯색을 꾸미거나 다소 수선스럽게 초면의 방문자를 환영하는 것은 이 사람 스타일이 아니었다. 말과 글이 그렇듯이 태도에도 군더더기가 없었다.
이화여대를 졸업하던 1984년, 제일기획에 카피라이터로 들어갔을 때 '미스 최'라고 불렸다. 질문을 던지는 것도 조심스럽게 만들 만큼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이 사람이 미스 최라고 불렸다는 것도, 사람들이 감히(?) 이 사람을 미스 최로 불렀다는 것도, 이 사람이 그런 호칭을 견뎌냈다는 것도 상상하기 힘들었다.
호칭만 그렇게 불렸던 것이 아니다. 선배들 책상을 닦고 보리차를 끓이는 것도 이 사람의 일이었다. 똑같이 대학을 졸업했는데도 남자 동기들보다 직급이 낮고 월급이 적었다. 남자 동기들이 연수원에서 신입사원 합숙 교육을 받을 때 이 사람을 포함한 여자 동기 4명은 회사 회의실에서 따로 교육을 받았다. 남녀는 당연히 동등한 존재라고 배웠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차별을 경험한 적이 없는 스물세 살 여성에게 세상은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달랐다. 그런 시절과 호칭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이화여대는 페미니즘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잖아요. 여성학 과목을 두어서 가르치기도 했고 선배들은 싸우라고 가르치는 편이었어요. 근데 저는 그 방식이 효과적이지 않다고 판단을 한 거죠. 남자들 100명 있는 곳에 혼자 뛰어들어갔는데 이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는 게 과연 나한테 이로울까, 차별을 극복하는 효과적인 방법일까? 그건 아니라고 판단을 했고 어차피 시스템이 이렇게 돼 있는데 하루아침에 고치기 어렵다. 그 사람들이 시스템을 고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야 이게 고쳐진다."
입사한 지 8개월 됐을 때 회사 대표 앞에서 당차게 왜 같이 입사했는데 남자 동기보다 월급이 적고 대우가 다르냐고 항의하기도 했지만 미스 최가 아니라 최인아로 대접받기 위해서는 능력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조직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꼭 필요한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조직에 손해라는 것을 그들이 깨닫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본 것이다. 당신은 카피라이터로 재능이 없는 거 같다는 말을 듣기도 했지만 죽으라고 노력했고 조직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입사한 지 7년 만에 쓴 "그녀는 프로다. 프로는 아름답다"라는 여성복 광고 카피는 이 사람의 고민이 그대로 담겼고 그 시대 젊은 여성들의 요구를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1992년 낸 〈프로의 남녀는 차별되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한 번도 있어 본 적이 없는 일을 할 때는 점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게 철칙"이라고 썼고, 양적인 변화 없이 질적인 변화는 없다고 믿는다. 그런 사람에게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페미니즘은 어떻게 보일까.
1호가 된다는 것의 의미
"저는 회사에서 일을 할 때 내가 받는 것보다 내가 내놓는 게 조금이라도 더 있을 때 제가 당당하다고 느끼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래서 임원이 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처음 한 생각은 내가 저 자리에 갈 만한가. 두 번째는 사람들도 과연 그렇게 생각할까, 내가 택도 없는데 여자를 시켜야 되니까 남자들이 가져야 될 기회를 빼앗고 쟤가 갔구나 이렇게 혹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저는 그런 게 신경 쓰였지 자리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어요."
삼성 공채 1호 여성 기록은 최초 전무, 최초 부사장으로 이어졌다. 한국일보 선임기자 김지은의 표현대로 "후배 여성 세대의 실재하는 희망"이 되었다. 1호가 된다는 것은 남들보다 더 먼저 어떤 자리에 올랐다는 것 이상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어느 분야에서 최초로 누가 뭘 했다고 하는 거, 1호가 나왔다고 하는 거는 단지 그게 '2호 3호보다 순서가 빨랐어'의 뜻이 아니고 그 사람이 그 일을 해 보이기 전까지는 그게 아무도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던 저기에 길이 있다라고,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곳에 길을 낸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뭘 잘했다 이 얘기가 아니에요… 진급을 했을 때 뒤에 오는 후배들에게 '저게 가능하구나, 길을 하나 보여줬구나' 그런 생각은 했죠. 제가 상무가 되고 전무가 되는 게 대단해서가 아니라 여성들이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던 시절이 길었기 때문에…"
'내가 잘하면 여자 전부가 잘하는 것이었고, 내가 기대에 어긋나면 내 후배들까지 희망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거기에서 멈춰 서지 않았다. 여성이라고 차별받는 것도 싫지만 특별한 배려도 원하지 않았다. '내가 여자니까 뭘 더 받아야 돼'라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자발적으로 선택한 퇴직
"저는 늘 가치를 내놓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공짜로 뭘 거저 얻고 이런 거 별로 원치 않아요. 나는 거저 받고 뭐 안 생기나 이거는 제가 당당하지 않았어요. 내가 뭔가를 했고 그 결과로 제가 속한 조직을 좀 낫게 하는 것. 그럴 때 저는 좀 이렇게 어깨가 펴지는 것 같은 인간이에요. 그래서 그만두는 게 어렵지 않았던 게 시시때때로 저한테 묻거든요. '너는 지금 이거 괜찮니? 이거는 네가 뭐 좀 잘한 것 같니?' 그 무렵에는 온몸으로 느낌이 왔습니다. '이제 다 한 것 같다'"
그 무렵 광고업계의 화두는 디지털 전환이었다. 내가 사장이 된다면 그 일을 잘할 수 있을까?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어 하나? 둘 다 아니었다. 그러면 결론은 분명했다.
-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에서 임원으로 10년 이상 지내셨잖아요. 돈만이 아니라 누리는 게 많죠? 그걸 10년 이상 하면 그러면 더 내려놓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는 그런 것보다 제가 제대로 있는 게 더 중요했어요. 기사 딸린 차를 타는 거 편하고 좋죠. 근데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거든요. 내가 운전하면 어때? 그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직급마다 나오는 차가 다른데 부사장이 되면 그때 에쿠스를 줬어요. 근데 저는 에쿠스 안 탔어요. 그 아래 등급인 제네시스를 탔어요."
- 일부러?
"일부러. 그건 제 선택이었어요. 왜 그랬냐? 에쿠스가 너무 버거웠어요. 제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 중에 하나가 저한테 어울린다 안 어울린다, 나랑 맞는다, 안 맞는다인데 그 이따만한 에쿠스가 저한테 안 어울리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나 그거 안 받겠다. 대신 제네시스에서 제일 높은 거 줘라."
지독한 에고이스트 같다고 했더니 맞다고 했다. 이기적인 게 아니라 자신에게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사적인 이유로 공적인 가치를 훼손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골프를 안 치니 임원들에게 나오는 골프회원권 대신 호텔 헬스클럽 회원권을 달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골프 회원권은 어쨌든 회사에 필요한 접대에 쓰이는 것이지만 헬스클럽은 완전히 개인용 아니냐는 것이다.
이 사람 퇴임식 동영상은 인상적이다. 동영상은 "차갑다, 차갑다 그리 말해놓고 울 때는 다 그 앞에서 울었다"는 자막으로 시작된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특히 후배들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보여주는데 2분이면 충분했다. 존재감이 뚜렷했으니 소개가 장황할 필요가 없는 거다. 회사에서 특히 후배들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는 사람이 그날 그 동영상을 보고는 울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진급해서 임원이 되고 조직의 관리자가 되었을 때 선배가 되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냉정하다는 말을 들었고 스스로 남에게 곁을 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 사람이 후배들 일이라면 열일 제치고 나섰다. 자기가 낳은 아이들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저 후배들 때문에 속을 끓이고 스트레스를 받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최선을 다한 것은 관리자로서 자신의 일이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도울 때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돌아보니까 내가 내 일을 잘해서 그걸로 제 값을 하고자 하고 살았는데 다시 보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돼서 상대방 얼굴이 펴지고 웃는 걸 볼 때 나도 기쁜 사람이구나라는 거를 알았어요. 임원 발표가 나서 어디 사진이 실리고 그걸 기쁘다고 표현하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좀 계속 괜찮은 인간이고 싶은 것 같아요. 그게 때로는 선배 역할에서도 나타날 때도 있었겠죠? 그래서 후배들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그걸 피하지 않고 끌어안으면서 스스로 괜찮아지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퇴사 이후 정치권에서 영입 제안이 있을 때나 다른 기업체 스카우트 제안이 있을 때 중요한 판단 기준이 후배들의 시선이었다. 이런 사람이니 후배들이 차갑다 차갑다 하면서도 울 때는 이 사람 앞에서 운 것이다.
"정치권에서 두어 번 영입 제안이 있었어요. 저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는데 내가 이렇게 하는 게 나를 바라봤던 내 후배들에게 괜찮은 결정으로 보일까? 그랬는데 아닌 것 같았어요. 그들이 창피하게 생각할 것 같았어요."
내려서고 멈추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직장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자신의 시간과 열정을 쏟아서 스스로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일이 회사 밖에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그것이 이 사람이 가진 최대의 장점, 분별력이다. 개인 이메일 주소가 inotstay. 나는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고 실제로 이 사람은 멈추지도, 멈출 생각도 없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윤춘호(논설위원) spring84@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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