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푸라기]경기 나빠 보험 깨는 서민 는다는데…
10년 비과세 채운 저축성보험 해지 늘어난 탓
고금리 영향 '연금보다 목돈, 보험보다 예·적금'
지난 2일자 한 경제지 1면에는 '고금리·고물가에…올 8월까지 32조 보험 깼다'는 헤드라인의 기사가 크게 실렸습니다. 생명보험협회 집계로 작년 1~8월에는 21조1179억원이었던 해지환급금(효력상실환급금 포함) 규모가 올해 같은 기간에는 31조9141억원으로 늘었다는 게 요지입니다.
작년 같은 기간보다 액수로는 10조7962억원, 비율로는 51.1%나 늘어난 규모입니다. 또 8월말 기준으로 역대 최대고요. 외환위기 직후(199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2008년)의 같은 기간보다도 큰 규모라 합니다. 그때보다 보험시장 전체 규모 자체가 커지긴 했지만, 국내 경기가 최악이던 그 시기보다도 요즘 보험 해약이 많다는 얘깁니다.
어쨌든 보험사가 지급한 해약환급금이 이렇게나 늘었다는 건 생명보험 상품 가입자가 만기까지 가지 못하고 스스로 중도 해지하거나, 보험료를 내지 못해 보험사가 강제로 계약을 해지했다는 거죠. 만기 때 약정된 수익이나 계약을 계속 유지할 때 받을 수 있는 보장을 포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이 신문은 거시적인 경제 환경 악화를 주된 배경으로 짚었습니다. 고금리·고물가에 경기도 위축돼 생계가 힘들어진 서민들이 보험 해약에 나선 것으로 본다는 보험업계 해석을 전했습니다. 생보업계 관계자도 "해지환급금 추이는 보험업계에서 실물 경기를 보는 주요 지표"라고 설명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올해 들어 이렇게나 경기가 나빠졌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좀 더 들여다봤습니다. 경기 말고 다른 요인도 있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금융감독원 집계를 통해 외국계를 포함한 전체 생명보험의 해지환급금(효력상실환급금 포함) 추이를 살펴봤습니다. 생명보험 상품은 크게 보장성과 저축성으로 나뉘는데요. 해지환급금 규모가 커진 것은 저축성 보험이었습니다.
연도별로 전체 해지환급금의 70% 안팎이 저축성보험이었고요. 해마다 전체 규모를 키운 것도 저축성보험이었죠. 특히 작년의 경우 저축성보험 해지환급금이 연간 35조5445억원이나 됐는데요. 전년의 배 가까이(93.5%) 늘었어요. 생명이나 건강 관련 위험에 대비하는 보장성보험 해지환급 규모의 변화는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저축성보험 해지만 늘었다는 점에 주목해 볼까요? 그러면 경기 탓에, 목돈이 필요해 위험 보장을 포기하거나 해지에 따른 손실을 감수하고 보험을 해지했다고 보긴 어려울 수 있죠. 저축성 보험은 만기까지 들고 있지 않더라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환급률이 100%는 넘는 경우도 많거든요.
특히 저축성보험은 2009년께부터 판매가 증가해 2011~2016년 사이 판매액이 최대였던 전성기를 누렸는데요. 가입 후 10년이 지나면 원금을 초과하는 환급금에 대해 비과세라는 특징도 있었죠. 이후 비과세 한도가 축소되면서 차츰 판매량은 줄긴 했어요.
종합해 보면 작년 이후 이 저축성보험의 해지가 늘었다는 것은 10여년 전 판매 '피크' 때 가입한 계약자들이 비과세 요건을 충족한 뒤 해지했을 수 있다고 볼 부분이 있는 겁니다.
게다가 저축성보험은 은행 창구에서 파는 방카슈랑스 형태로 많이 팔렸는데요. 작년 이후 금리가 오르고, 은행도 수신을 통한 자금확보에 나서면서 창구에서 보험상품보다는 예·적금이 잘 나가고 있죠. 직원들도 그걸 권하고요. 특히 10년 전 저축보험보다 최근의 예·적금 금리가 높으니 갈아타는 게 낫다는 선택이 많아질 수 있는 거죠.
한 생보사 관계자는 "해지환급금 증가는 경기 악화가 기본적인 배경일 수 있다"면서도 "다만 금리가 오르는 등 경제활동 여건이 달라진 만큼 만기 후 연금으로 저축보험금을 타는 것보다, 이를 해지해 받은 목돈으로 다시 예·적금을 들거나 다른 투자상품을 택한 경우도 많은 듯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추세에 대한 분석도 있는데요. 이석호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보고서에서 경기 악화로 인한 긴급자금 필요에 따른 해지와 함께 "금리 수준이나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다른 업권 금융상품으로 자금이 이동하면서 보험해약이 발생한다"는 설명도 내놨습니다. 2금융권 자금이 은행으로 쏠리는 '역머니무브'의 일환이란 거죠.
보험연구원의 김세중 연구위원과 김윤진 연구원은 작년 말 보고서에서 대형 포털(네이버)의 '저축보험 해지' 검색량이 작년 9~10월 크게 늘었다는 점(9월 넷째 주 21.46→10월 넷째 주 100)에 주목하기도 했는데요. 이 역시 시중금리 상승과 함께 저축보험 대체재라고 할 수 있는 은행 예·적금으로 몰리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보험상품 해지환급금은 경기 흐름과 상관성 없이 또 늘어날 여지가 있습니다. 고금리 지속 속에 10년 비과세 혜택을 채우는 저축성보험 계약이 2~3년 뒤까지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요. 또 재작년께부터는 환급률이 높아 해지 부담이 적은 단기납 종신보험 판매도 확 늘었거든요. 수년 뒤 해지로 쏟아져 나올 수 있는 계약들이죠. ▷관련기사: [보푸라기]환급률 100% 넘는 단기납 종신…좋은상품일까?(7월8일)
어쨌든 보험 해지환급금이 늘어나는 것은 경기 측면에서도 적신호지만 보험사, 그리고 보험 계약자들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먼저 계약자는 연금으로 설계해 둔 노후 계획이 틀어질 수 있죠. 중도 해지한 목돈으로 또 다른 재산 증식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겠지만, 그만큼 변동성에 노출된다는 게 문젭니다.
보험회사에는 더 좋지 않습니다. 김세중 연구위원은 보고서에서 "저축보험 계약 이탈이 지속될 경우 대규모 채권매각에 따라 채권시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보험회사의 건전성도 악화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만큼 보험회사는 저축보험 소비자의 계약유지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제언하죠. 저축보험상품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상품 유지율은 보험업계에 올해부터 적용되는 새 국제회계기준(IFRS17)에서 재무건전성 평가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고 보면 결국 눈앞의 판매 실적만 좇았던 저축보험이 만기까지 가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계약자들이 안심하고 든든하게 들고 노후를 맞을 수 있는 연금저축보험 상품을 설계하고 운용하는 것이 보험사들에게도, 보험 소비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 될 겁니다.
[보푸라기]는 알쏭달쏭 어려운 보험 용어나 보험 상품의 구조처럼 기사를 읽다가 보풀처럼 솟아오르는 궁금증 해소를 위해 마련한 코너입니다. 알아두면 쓸모 있을 궁금했던 보험의 이모저모를 쉽게 풀어드립니다. [편집자]
윤도진 (spoon504@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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