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가 배신으로… 집단 속 잊히는 개인의 감정·욕망을 담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직관적 드로잉 낱장이 모여 저마다 이야기로
연속 재생 애니메이션 영상, 표현 매체로 다뤄
투병 환자 일상 보여주는 ‘팔리 박사의 목욕법’
불완전한 존재의 덧없는 희망 풍자 블랙코미디
유명 시구·노랫말 차용 화면에 문구 자주 도입
조각난 장면들에 숨겨진 서사·심리와 맞닿아
검은색 스프레이로 그린 직선들이 비뚤댄다. 선들은 손 가는 대로 휘청이며 흰 벽 위에 격자무늬 타일을 깐다. 어두운 조도의 배경을 비집고 고개 내민 주홍빛 샤워기들, 영문 모를 거울 한 조각. 곳곳의 여백에 작가의 드로잉이 걸리고 크게 비운 두 벽에 애니메이션 영상이 투사된다. 지난달 28일 막을 내린 송은의 전시 ‘파노라마’에서 심래정(40)이 선보인 설치 작업에 관한 이야기다.
◆덧없는 희망에 관한 블랙 코미디―‘팔리 박사의 목욕법’
다분히 수상하고, 그만큼 신비로운 방의 정체에 관한 단서는 내부에 놓인 드로잉과 회화, 영상 작품의 내용 가운데 실낱처럼 숨어 있다. 이곳은 작가가 만든 가상의 인물 ‘팔리 박사’의 목욕탕이자 실험실이다. 팔리 박사는 거의 모든 포유류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목욕법을 개발한 유능한 연구자다. 그는 다양한 시도 끝에 인간을 실험 대상으로 삼기를 시도하는데, 실험 도중 스스로 의문의 병에 걸리게 되었음을 깨닫는다. 박사는 자신이 개발한 목욕법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에 의지해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드로잉 애니메이션 ‘바-스 하우스 팔리 박사의 목욕법’(2023)은 투병 중인 환자의 일상을 비추어 보여 준다. 진흙 덩어리 같은 모습의 환자는 격자무늬 돗자리에 새까만 몸을 드러눕혀 휴식하던 중 하늘에서 떨어진 문서를 받아 든다. 팔리 박사의 목욕법을 광고하는 전단지다. 환자는 치료를 위한 목욕법 실천에 나선다. 냉탕에 들어가려 샤워기로 몸을 희게 세척하고는 곧 지하 실험실에 떨어져 산성 농도를 조절하는 완충 용액에 몸을 담근다. 이내 기계 팔에 의해 또 다른 방 안 120도의 뜨거운 열탕으로 옮겨진 후 음압병실에 들러 인증되지 않은 팔리 박사의 치료법을 시도한다. 영상의 후반부는 다시 한 번 돗자리에 누운 새까만 환자의 모습을 비춘다. 병이 채 낫지 않은 모양이다. 다시 한 번 하늘로부터 목욕법 지침을 광고하는 문서가 떨어지지만 포기한 듯 모닥불에 종이를 던져 태워 버린다.
조각난 단편의 장면들은 단서만을 제공할 뿐 세세한 이야기 구조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관객 앞에 주어진 회화와 영상의 화면은 사건의 단면을 짤막하게 분절하여 모호한 상태 그대로 비추어 보여 준다. 심래정의 작품을 대하는 데 서사에 관한 완벽한 이해는 필수적이지 않다. 화면 안팎의 텍스트는 마치 이미지처럼 기능한다. 전체의 서사는 조각난 단편의 영상 안에, 멈추어 있는 드로잉 속 장면 안에 부분적으로만 갈무리된다.
심래정은 영어 또는 한글로 된 문구를 화면에 자주 도입하는데, 유명한 시구나 노랫말 등에서 차용한 경우가 많다. 평상시에 사용되는 언어보다 오히려 풍부한 의미를 함축한 글귀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근작 회화 ‘팔리 박사의 집’(2023)의 화면 속 분할된 구획들은 저마다 투병 중인 팔리 박사의 일상생활을 묘사한다. 화면에 한글로 적어 넣은 글귀는 랭보의 시 ‘감각’과 ‘굶주림’ 등에서 가져온 것이다. 해당 시가 수록된 ‘지옥에서 보낸 한철’을 집필하던 당시에 랭보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격정적 시기를 보냈다. 그러한 폭풍 같은 감정이 투병 중인 팔리 박사의 심리와 닿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의 시구를 화면 위에 끌어왔다.
심래정의 주제는 집단적 규모의 세상 속 개인의 심리에 관한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일상의 날들 속 사소한 사건들과 그것에 연루된 관계들, 개인의 감정들, 불온한 욕망들이 작업의 소재가 된다. ‘층간소음’(2012∼2013)은 가상의 건물에 거주하는 입주자들이 층간소음으로 갈등을 겪는 상황을 소재로 제작한 드로잉 애니메이션이다. 층간소음에 시달리던 입주민은 자신의 복수극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건물 지하에 살고 있는 바퀴벌레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화면 속 우울과 고통의 덩어리들, 욕망과 절망의 찌꺼기들이 무심한 눈빛으로 이곳을 내다본다. 긍정과 희망을 요구받는 매일의 살아감 가운데 가끔은 실망하고 좌절해도 된다. 그래야 보통의 사람이니까. 다시 일어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쁨의 웃음보다도 내상 앞에 무던한 냉소일 터다.
박미란 큐레이터·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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