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우화로 은폐한 전쟁의 역사

한겨레 2023. 11. 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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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한겨레S] 손희정의 영화담(談)
2차 대전기 생사 얽힌 탑 배경
메이지유신·탈아입구 등 은유
무너진 탑에 책임은 외부로
거장의 회고적 기록으로만
메가박스중앙㈜ 제공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이하 ‘그대들은’)가 화제다. 호불호가 갈리는 와중에 개봉 2주차에도 예매율 1위를 지켰다. 이야기 속 여러 설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난해하다’는 평가도 나오지만, 해석이 어렵거나 메시지가 모호한 작품은 아니다. 내 경우엔, 처음에는 즐겁게 따라가다 도중에 그만 지루해졌다.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 11살 마히토는 전쟁 2년차에 화재로 어머니를 잃는다. 3년차에는 아버지와 함께 도쿄를 떠나 어머니의 본가와 아버지의 군수공장이 있는 시골로 이사한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동생 나츠코와 결혼해 이미 신혼 생활을 시작한 참이다. 소년의 앞에는 동생을 임신한 “어머니와 똑 닮은” 이모를 어머니로 받아들이고, 아버지가 새로이 만든 가족의 건강한 구성원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과제가 놓여 있다.

제목은 거룩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이 성장과정은 소년이 선인지 악인지 잘 구분되지 않는 안내자를 따라 들어간 별세계에서 펼쳐진다. 심한 입덧으로 앓아누운 나츠코가 무언가에 이끌려 숲의 오래된 탑 안으로 사라지자, 마히토도 그곳으로 간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사람”을 되찾아야겠다는 생각도 있지만, 이사 온 날부터 왜가리 한 마리가 자꾸만 “탑 안에 당신 모친이 살아 있다”고 유혹했기 때문이다.

탑 안에서 마히토는 생과 사가 뒤얽힌 시공간을 경험한다. 그곳에선 인간의 씨앗인 ‘와라와라’를 잡아먹는 펠리컨처럼 내가 살기 위해선 남을 잡아먹어야 하고, 그 살상 덕분에 인간세계의 인구는 적절히 조절되고 있다. 무엇보다 마히토는 이미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어린 시절인 ‘히미’와 만나게 된다. 어머니 역시 11살 즈음 탑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 1년 동안 행방불명된 적이 있는데, 그 시절의 어머니가 불을 다루는 소녀의 모습으로 탑 안을 누비고 있는 것이다. 마히토는 어머니-히미의 도움을 받아 ‘탑의 돌’에게 납치된 나츠코를 구한다.

우리 시대의 거장이 마히토(眞人: 진인, 진실한 사람, 참인간, 그리고 득도한 신선이라는 뜻도 된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거룩한 질문을 던지지만, 이야기 자체는 탑 안에 갇혀 있는 ‘소녀-어머니-곤경에 빠진 잠든 공주’를 구하는 소년-왕자의 스토리에 머문다. 감독이 지금까지 보여줬던 소년·소녀의 역동적인 형상에 비하면 꽤 고리타분하다.

다만 흥미로운 건 탑의 성격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거대한 탑은 “메이지유신 직전 하늘에서 떨어졌다.” 이 탑의 귀한 힘을 알아본 ‘어머니들의 큰할아버지’(마히토에겐 고조부)는 탑을 지키기 위해 건물을 세운다. 건축 과정에서 사건 사고가 이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지만, 힘을 가진 엘리트였던 큰할아버지는 결국 탑을 둘러싼 ‘서양식 건물’을 완성했다.

‘그대들은’은 탑 주변에 건물을 세우는 과정 자체가 메이지유신 시기 일본이 문호를 개방하고, “천둥소리를 내며” 일본에 닥쳐온 서구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탈아입구’(아시아를 떠나 서구로) 하려 했던 근대국가 건설 과정에 대한 은유라는 걸 숨기지 않는다. 그리고 온갖 새로운 지식의 보고였던 탑은 일본제국의 성장을 이끌었지만,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시점에 이르러 바로 그 지식들의 무덤이 되었다. 마히토가 탑 아래의 지하 세계로 들어가자마자 마주치는 돌무덤 앞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다. “나를 배우는 자,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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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배경으로 은폐하는 묘기

메가박스중앙㈜ 제공

큰할아버지가 신문물을 바탕으로 탑 안에 세운 세계는 탑을 이루고 있는 돌이 지닌 ‘악의’에 의해 지배받는 세계다. 그 안에서 인간의 마음을 가진 앵무새들은 파시스트 국가를 세우고, 다른 생명을 속여 잡아먹으며, 자신의 것이 아닌 영토 탑에 욕심을 낸다. 그리고 약탈자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왕답게 전진하는 자”를 통치자로 세운다.

큰할아버지는 앵무새들의 요구와 달리 탑을 혈연으로 이어진 마히토에게 물려주고자 하지만, 마히토는 이를 거절한다. 자기 역시 악의를 가진 자로서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큰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새로운 세계를 세우는 대신 “친구를 만들겠다”고. 큰할아버지의 탑은 결국 무너진다.

이건 가장 지루한 클라이맥스였다. 탑 밖에서 실제로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단 걸 너무 쉽게 외면하기 때문이다. 탑이 무너진 뒤 식인 앵무새들은 사랑스러운 작은 새로 변한다. 마히토는 한 뼘 성장하고 과업을 이루어 트로피로 ‘가족’을 얻었다. 후일담은 세상 평화롭다. 이후 아버지는 군수공장의 성공을 발판으로 전후 일본의 부흥을 이끄는 기업의 총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기업을 보통 ‘전범 기업’이라 한다. 거장은 전쟁의 역사를 손바닥 뒤집듯 간단하게 탑 안의 우화로 바꾸어 버렸다. 외부에서 날아온 돌덩이를 탓하면서.

소녀-어머니의 이름인 ‘히미’의 ‘히’는 불(火)을 의미하겠지만, 동시에 ‘여름’(夏)일 수도 있고(여자 이름인 ‘나쓰미’(夏美)는 ‘히미’로도 읽힌다), 그런 의미에서 히미는 동생 나츠코(夏子)와 어쩌면 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 말장난 안에서 ‘불의 힘’은 ‘여름의 풍요’가 된다. 어머니의 생명을 앗아간 화마와 히미가 생명을 짓고 지키는 빛(光, 히카리)은 불의 양면이고, 이는 나츠코의 출산의 역능과 겹쳐진다. 게다가 작품은 담배와 성냥(히카리), 화로 같은 작은 불의 묘사에도 정성을 들인다.

이처럼 불의 다면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감독이 아주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전쟁에서 살상 무기로 사용되는 포탄의 불꽃이다. 생생한 피의 묘사 역시 오로지 마히토가 스스로를 해할 때에만 등장한다. 왜인가?

‘그대들은’은 배경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인물들을 제외한 현실 세계의 그림은 수채화풍으로 뭉그러져 있다. 기존의 작품과는 다른 작화다. 이는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한껏 고양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이야기가 그저 ‘노익장’이 마음으로 그린 회고적 기록일 뿐이라는 변명이 된다. 덕분에 작품은 전쟁을 배경으로 함으로써 전쟁을 은폐하는 묘기를 선보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밤에 핀 벚꽃처럼 아름다운 이 작품은 아무런 감흥도 남기지 못한다.

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저자. 개봉 영화 비평을 격주로 씁니다. 영화는 엔딩 자막이 올라가고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서는 순간 다시 시작됩니다. 관객들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그리고 글을 통해서. 영화담은 그 시간들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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