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드라마’ 성공 공식 거스른 〈무빙〉의 가치 [K콘텐츠의 순간들]
10월8일 부산 영화의전당에서 '2023 아시아콘텐츠어워즈 & 글로벌OTT어워즈'가 열렸다. ‘아시아콘텐츠어워즈’에서 바뀐 명칭이다. 2019년 신설된 ‘아시아콘텐츠어워즈’는 원래도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를 심사 대상으로 했는데, 올해부터는 글로벌 OTT 콘텐츠로까지 대상을 확대했다. OTT 콘텐츠의 위상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올해 시상식 최고 작품상과 최다 수상작의 영예도 OTT 콘텐츠에 돌아갔다.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무빙〉이 그 주인공이다.
흥미로운 것은, 〈무빙〉이 최근 OTT 주도의 K드라마 성공 공식과 다소 거리가 있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를 비롯한 OTT의 드라마들은 시즌당 10회 내외의 미니시리즈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에피소드 개수는 줄어들었으나 그 안에 최대한 많은 볼거리를 담아내기 위해, 거의 모든 장르적 요소를 뒤섞는 뷔페식 스토리텔링을 추구하며 이를 매우 빠른 호흡으로 전개한다. 자극적 콘텐츠를 찾아 빠르게 플랫폼을 갈아타는 ‘구독자’들을 붙들기 위한 전략이다.
이 같은 추세와 달리, 〈무빙〉은 이례적일 만큼 길고 느린 호흡의 20부작 드라마다. 주된 장르는 초능력 액션 히어로물에 총제작비 500억원을 들인 대작임에도, 장르적 스펙터클보다 인물 하나하나의 서사에 더 공을 들였다. 실제로 구성상 1부에 해당하는 1회부터 7회까지 조인성·한효주·류승룡 등의 톱스타들은 이야기의 뒤로 물러나 있고, 이정하·고윤정·김도훈 등 신인배우들이 연기하는 10대들의 성장드라마 위주로 전개된다. 초능력이라는 극적 장치는 액션물로서의 쾌감보다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도 꿈을 펼치기 어려운 고등학생들의 고민 안에서 더 빛을 발한다.
톱배우들이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2부도 크게 다르지 않다. 10대들의 부모인 1세대 초능력자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첩보물, 누아르 등 다양한 장르적 스타일이 시도되지만, 역시 이야기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초능력자 이전에 ‘휴머니스트’인 두식(조인성)과 미현(한효주), ‘로맨티스트’인 주원(류승룡)과 지희(곽선영)의 섬세한 서사가 핵심이다. 남들과 다른 능력 때문에 괴물로 취급받고 국가에 이용당하는 부모들의 절절한 이야기는, 작가가 1부에서 공들여 쌓아온 10대들의 실존적 고민의 서사와 만나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예컨대 17회에서 두식의 말이 아들 봉석의 각성과 맞닿게 되는 장면이 그렇다. 수없이 추락하던 두식이 ‘높이, 멀리’ 날 수 있는 법을 깨우치게 된 것은 “잘 날기 위해서는 잘 떨어지는 게 중요하다”는 진리를 알아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걱정, 현실의 억압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위축된 삶을 살아왔던 봉석은 사랑하는 친구가 위험에 처하자 비로소 실패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날 수 있게 된다. 〈무빙〉에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시선을 빼앗는 것은 결국 그 폭발적인 감정의 드라마다.
서사의 힘을 증명한 드라마
〈무빙〉의 성공은 최근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스펙터클과 고자극 스토리텔링에 치중하는 K드라마들이 근본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들을 말해준다. 바로 인간의 감정을 치밀하고 깊이 있게 그리는 서사의 힘이다. 〈무빙〉에는 주인공들 외에도 조역에 해당하는 캐릭터들을 전면에 내세워 각각의 스핀오프 시리즈를 만들어도 될 만큼 인상적인 서사가 가득하다. 최일환(김희원)의 이야기가 대표적 사례다. 초능력자는 아니지만 국가에 이바지하는 영웅이 되고 싶어서 국정원에 입사한 그는 ‘국가재능육성사업’ 프로젝트 임무를 부여받는다. 고등학교 교사로 위장해 잠재력을 지닌 학생들을 발굴해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그의 주 임무다. 드라마는 ‘경계인간’이라는 부제의 에피소드 하나를 통째로 할애해, 학생들을 ‘쓸모’에 따라 분류하던 블랙요원 최일환이 차츰 제자들과 교감하는 인간적인 선생으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학생들을 적격자와 부적격자로 가르고 평가하던 그가 제자들의 생활기록부를 보면서 성장에 흐뭇해하는 장면은 드라마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다.
최일환의 제자였던 전계도(차태현)의 이야기도 그렇다. 초능력물 캐릭터로 설명하자면, 전기 능력자에 해당하는 전계도는 최일환의 국가재능육성사업 테스트 당시 자기도 모르게 ‘부격적’ 판정을 받은 뒤 방송연예과에 진학한다. 대학 졸업 뒤에는 전기를 다루는 능력을 살려 어린이 뮤지컬 속의 슈퍼히어로 ‘번개맨’으로 활약하게 된다. 뮤지컬 속에서는 초능력으로 어린이를 구하는 영웅이지만, 현실 속 전계도는 제작자의 눈치에 주눅드는 고용자일 뿐이다.
강풀 작가의 동명 원작 웹툰에는 등장하지 않는, 드라마 오리지널 캐릭터인 전계도는 사실 전체 플롯에서 꼭 필요한 캐릭터가 아니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하지만 꿈과 능력을 제대로 펼쳐내지 못하고 현실의 중력에 붙들려 사는 전계도의 애환은 〈무빙〉이 일관되게 그려내는 ‘감정의 드라마’를 잘 보여준다. ‘번개맨’이라는 부제의 전계도 에피소드는 최일환의 에피소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막극 같은 완성도를 지니고 있다.
글로벌 OTT가 주도하는 콘텐츠 시장은 점점 더 큰 스케일과 과잉의 이야기를 욕망한다. 캐릭터는 스펙터클의 부속품이 되고, 내밀한 고민과 감정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그 ‘부적격 가치’들에 주목한 〈무빙〉의 성공은 그래서 더 높이 평가될 만하다.
김선영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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