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연구하다 암 환자 됐지만"···카이스트 학생들의 눈물겨운 실패담 들어보니 [일큐육공 1q60]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현대지성)을 쓴 이나다 도요시는 요즘 청년들이 영화 요약본이나 건너뛰기 버튼을 선호하는 현상에서 재미없는 결말에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심리, 즉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읽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일상에도 널리 퍼져있는 것이다.
빛나는 성공 뒤에는 항상 실패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실패를 용인하는 것에 인색하다.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을 묻는 설문 결과(대한상공회의소, 2017) '실패 후 재기할 수 있는 사회 안전망(38.5%)'이 1위, '도전 격려하는 사회 분위기'(29%)가 2위로 꼽혔다. 한국식 경쟁 사회의 단면이 여실히 드러나는 결과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하 실패연구소(소장 조성호)는 이렇듯 실패를 두려워한 나머지 도전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 주목, 실패를 오히려 드러내고 그것을 통해 배우는 문화를 전파하고자 지난 2021년 만들어졌다. 실패연구소가 2년 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올해 야심 차게 기획한 '실패주간'이 최근 대전 KAIST 본원에서 열흘간 진행됐다. 그중 하이라이트인 '망한 과제 자랑대회'가 지난 1일 오후 학생들의 뜨거운 참여 속에 펼쳐졌다. 서울경제 유튜브 <일큐육공 1q60>이 현장을 영상으로 담아왔다.
◇제대로 망한 학생에게 상을 줍니다···'마상, 떡상, 연구대상' = "코로나19 때 나름 유튜브 보고 책도 보고 연구해서 엄선한 종목에 소신투자 했죠. 1년 지나더니 반토막 납니다. 지금이요? 바닥인 줄 알았는데 지하가 있더라고요. 되돌아보니 제가 투자 실패를 수용하기까지 다섯 단계를 거쳤습니다. 이걸 알고 나니 나중에 큰 실패를 해도 빠르게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아요." (배서연·KAIST 화학과 학사과정·인기상 수상자)
"자동차 동아리 친구들과 티코를 고쳐 유라시아를 횡단했는데, 안타깝게도 6중 추돌사고가 났습니다. 왼손에 철심 3개 박아 잘 안 움직여지지만 남은 오른손으로 코딩도 하고 용접도 하며 국제대회에서 상도 받았죠. 제 인생에 교통사고로 손 하나 날린 적도 있는데, 이제 웬만한 실패에는 좌절하지 않고 잘 극복해가려고 합니다." (박정수·KAIST 기계공학과 석사과정·떡상 수상자)
부모님을 돕고자 숱한 도전과 좌절 끝에 전액장학금을 받고 KAIST에 합격한 필리핀 유학생 이사 산 후안(건설및환경공학과 학사과정) 씨가 '마상'을, 암 연구를 하다 만24세에 뇌혈관종 환자가 됐지만 더 연구해서 쓴 암 논문이 '한빛사'에도 선정되고 최근 박사 학위까지 잘 마쳤다는 문진우(생명과학과 박사과정) 씨가 '연구대상'을 받았다.
이밖에 중요한 전공 과제를 사과문 포함 네 줄짜리 리포트로 써낸 학생의 눈물겨운 사연과 누구보다 열심히 문제를 풀었고 성취감도 컸지만 성적이 0점이었던 학생의 가슴아픈 사연 등 KAIST 학생들의 웃픈 실패담이 마이크를 타고 청중들에게 유쾌하게 전해졌다. 안치영 문화기술대학원 석사과정 학생은 한국 전통문화인 '낙화놀이'를 실패에 비유해 주목받았다. 그는 "떨어지고 부서지는 동안에도 아름다운 빛을 내는 불꽃처럼 우리의 실패도 분명 우리 인생을 성공하게 만들 것"이라고 전했다.
스탠딩 코미디 형식으로 진행된 이날 '망한 과제 자랑대회'는 KAIST 학생 뿐만 아니라 인근 직장인, 아이와 함께 온 부모 등 주민들도 함께 즐겼다.
◇ 실패를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을 때 뭔가를 배울 수 있다 = 이번 '실패주간'에는 안혜정 실패연구소 연구조교수(사회 및 문화 심리학 박사)가 '포토보이스'라는 연구 방법을 통해 학생들과 실패를 연구한 결과를 사진전 형태로 공개하기도 했다. 일큐육공과 만난 안혜정 조교수는 "사회도 그렇고 카이스트에서도 성공 이야기는 굉장히 많다, 하지만 실패 이야기는 자꾸 숨기게 되고 혼자 자괴감이나 고립감에 빠지게 된다"면서 "실패를 심리적으로도 안전한 방식으로 공유하고 드러낼 수 있는 방법들을 찾게 됐고 이렇게 실패를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을 때 실패를 통해 뭔가 배울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연구 취지를 설명했다.
KAIST에 따르면 한국의 국가R&D 과제 성공률은 약 99%. 실패에 대한 압박과 두려움 때문에 성공할 수밖에 없는 연구만 시도한다는 지적이 따른다. 실패연구소는 실패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연구 결과를 내부에 공유함과 동시에 학교 구성원과 사회 전체에 실패에 대한 긍정적 메시지를 공개 행사와 뉴스레터 등을 통해 전파하고 있다.
조성호 실패연구소장은 "그동안 한국 사회가 경쟁이 심하고 누군가는 승자가 누군가는 패자가 되는 분위기다보니 실패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게 되는 분위기나 경향이 짙다"면서 "실패란 나쁘고 부정적인 게 아니다, 더 큰 교훈을 얻을 수 있고 이를 통해 더 큰 성공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실패를 용인해주고 인정해 주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강신우 기자 seen@sedaily.com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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