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 되는 '피의 보복'…하마스는 왜 이스라엘을 공격했나[이-팔 전쟁 한달]
하마스, 2년간 치밀하게 작전 계획…70여년간 갈등 지속
(서울=뉴스1) 정윤영 기자 = 현지시간으로 토요일인 지난 10월 7일 새벽 6시. 팔레스타인 무장정파인 하마스는 이스라엘에 대규모 기습 공습을 감행했고,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은 4주가 경과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가자지구에서 사망자 수가 9000명을 넘어선 가운데 이스라엘의 지상공격이 본격화하면서 아랍권 국가에서는 반(反) 이스라엘 여론이 확산하고 있고, 하마스를 지지하는 이란과 레바논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개입 가능성까지 거론되며 중동 정세는 요동치고 있다.
◇ 하마스는 왜 지금 이스라엘을 공격했을까?
하마스는 대규모 기습 작전을 펼치기 위해 약 2년간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은 로이터통신에 "하마스가 지난 몇 달간 이스라엘을 교란시키기 위해 전례 없는 정보 전술을 사용했다. 대규모 작전을 준비하는 동안 이스라엘과 싸우거나 대치할 의사가 없다고 대중에게 인상을 심어줬다"며 이스라엘의 정보전 실패의 배경을 설명했다.
특히 이스라엘은 미국의 중재로 2020년 아랍에미리트(UAE)와 바레인, 모로코 등과 '아브라힘 협약'을 체결하고 관계를 정상화한 데 이어 올해 들어 사우디아라비아와도 외교 관계를 맺으려고 하고 있다.
이에 하마스는 자신들의 입지가 크게 좁아질 것을 우려해 공격에 나선 것이란 분석에 힘이 실린다. 실제 이스라엘-하마스 분쟁 이후 사우디는 이스라엘과 논의하던 수교 협상을 돌연 중단했다.
또한 하마스는 이스라엘이 사법부의 권한을 제약하는 사법 개혁을 추진해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시기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시발점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간 '불편한 동거'는 2000여년 간 핍박 받으며 유럽 전역으로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19세기 말 시온주의 운동에 따라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됐다.
그러다 영국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세계 1차대간 참전을 촉구하며 '벨푸어 선언'(1917)과 '맥마흔 선언'(1915년) 등 상충되는 약속을 건넨 것이 오늘날 갈등의 기원이 되고 있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이었던 아서 벨푸어는 '벨푸어 선언'을 통해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국가를 건설하는 방침을 지지한다고 약속한 반면 당시 이집트 주재 외교관 헨리 맥마흔은 팔레스타인들에게 자신들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이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유엔이 1947년 이른바 '두 국가 해법'인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채택하면서 갈등은 재점화됐다. 이스라엘은 기존 6%를 차지하던 팔레스타인 영토를 56%로 확대하라는 유엔의 분할안을 적극 환영했고, 외면 당한 팔레스타인들은 피난길에 나서야 했다.
영국은 1948년 팔레스타인 문제를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철수했고, 그 후 4차례나 이어진 전쟁으로 영국이 통치하던 팔레스타인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70만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는 물론 가자지구,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등지로 쫓겨났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이런 역사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랍어로 '나크바', 즉 '대재앙'이라고 부르며 한탄한다.
◇ 4차례 중동 전쟁…영토 확장한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주변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부정하며 연합군을 결성해 4차례 전쟁을 벌였다. 이스라엘 건국을 막으려던 1차 중동 전쟁 이후 중동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3차례나 더 전쟁을 치렀고 오늘날 이스라엘은 건국 당시보다 더욱 확장된 영토를 갖게 됐다.
'이스라엘 건국전쟁'이라고도 불리는 1차 전쟁(1948~1949) 당시 이집트와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 등 아랍 5개국 군이 이스라엘을 공격했지만, 결과는 아랍권의 참패였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독립 전쟁'이라고도 여겨진다.
2차 중동전쟁은 1956년 수에즈 운하를 둘러싸고 이집트와 이스라엘, 영국,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후 세월이 흘러 1967년.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를 선제 공격해 요르단으로부터 서안 지구와 동예루살렘을, 시리아로부터 골란 고원을, 이집트로부터 가자 지구를 탈취했다.
또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의 선제 공격으로 시작된 욤키푸르 전쟁(4차 중동 전쟁) 당시 이스라엘은 3주 만에 두 군대를 밀어내며 승리를 자축했다.
전쟁 외에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분쟁이 있었는데 1987년부터 1993년, 2000년부터 2005년까지 두 차례의 인티파다(봉기) 즉, 이스라엘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저항운동이 있었다.
◇ 평화를 이루기 위해 어떤 시도가 있었나?
이스라엘과 중동 국가들과 화해의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93년 이스라엘 총리 였던 이츠하크 라빈과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폭력을 폐기하고,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2개의 문서들을 서명했다. 이에 대한 답례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공식 승인했다.
2000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중재 하에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는 캠프 데이비드 정상회담에 참석했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최종 평화 협정 체결에는 실패했다.
또 2002년 아랍 연맹은 이스라엘이 1967년 중동 전쟁에서 점령한 땅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하며 팔레스타인 난민을 위한 '정의로운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가로 모든 아랍 국가와 정상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묵었던 이스라엘 호텔을 하마스가 폭파하면서 좌절 되고말았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재임 기간 미국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함으로써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간 긴장감은 더욱 고조됐다.
한편 현재까지 양측에서 보고된 누적 사망자는 1만598명을 넘어서고 있지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는 '두 국가 해법'과 팔레스타인 영토 내 이스라엘 정착촌, 예루살렘 문제, 국경 그리고 팔레스타인 난민 등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어 평화 가능성이 요원해 보인다.
yoong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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