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과학'으로 40년 만에 재탄생한 서울 지하철 노선도
이것은 시각 디자인의 정수. 디자인을 전공하는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 과제로 만나게 되는 연습문제. 세계 곳곳의 대도시에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인 공공 디자인. 바로 지하철 노선도다.
서울 지하철 노선도가 40년 만에 새롭게 탈바꿈했다. 동그란 모양의 2호선과 서울 가운데를 흘러가는 한강 그다음 눈에 들어오는 복잡한 환승역까지. 당신의 시선이 모였다 흩어지는 모든 지점 뒤에 인지과학이 숨어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던데 서울 지하철 노선도(이하 노선도)만큼은 40년이 흐르도록 변함없었다. 1980년대 4개 노선(106개 역)부터 2000년대 9개 노선(338개 역), 2023년 현재 23개 노선(624개 역)에 이르기까지 노선도는 같은 모습을 고수해왔다. 새 노선을 끼워 넣느라 점점 복잡해지는 노선도를 보며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는 후문이다.
권은선 서울시 공공디자인진흥팀장도 그 중 하나였다. 10월 5일 오후 서울시청에서 만난 그는 “(노선도 디자인 개선은) 입사 시절부터 마음에 품은 목표였다”며 운을 뗐다.
“이전 노선도는 정보량이 많은 데다가 각 노선의 시작점과 끝점이 좌우에 일렬로 정렬돼 있었잖아요? 그러면 시선이 좌우로만 움직여요. 하지만 지도는 원래 동서남북을 다 읽을 수 있어야 정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요. 헷갈릴 수밖에 없었죠.”
시각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바로 시선이다. 페이지를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눈길이 가는 곳에 가장 중요하고 재미있는 정보를 넣어 독자의 시선을 끈다. 그게 원칙이다.
권 팀장에게도 같은 원칙이 있었다. 임팩트를 줘서 시선이 먼저 가는 지점을 만들고 그 지점을 따라 정보를 순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독자 여러분 중 십중팔구는 개선된 노선도를 처음 마주했을 때 동그랗게 그려진 2호선이 먼저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디자이너가 계산한대로다.
● 시선을 모으고 퍼뜨리는 노선도 속 숨은 장치
시선의 흐름을 통제하는 디자이너의 마법은 인지과학에 그 뿌리를 둔다. 권 팀장은 “디자인은 물건을 예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그 기능을 사용자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과정”이라며 “사람의 인지과정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은 학부 과정에서 인지과학이나 색채지각 등의 수업을 듣는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인지과학자의 눈으로 본 개선된 노선도는 어떨까. 권오상 UNIST 바이오메디컬공학과 교수는 눈으로 얻은 정보를 해석하는 과정인 시지각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10월 6일 그와 함께 개선된 노선도를 보며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 지도를 처음 봤을 때 가운데 동그라미로 그려진 2호선 노선도가 확 튀어나와 보이죠? 그럼 당연히 우리의 주의도 동그라미로 쏠리게 됩니다. 비주얼 서치(시각 탐색) 과정에서 어떤 물체가 주의를 돋우면 그 주의 지점에 대한 반응이 무척 빨라진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이 지도는 2호선을 중심으로 지도를 봐야 하는 사람에게는 편할 거예요. 대신 2호선 말고 다른 노선에 있는 역을 찾기 위해서는 조금 시간이 더 걸리겠죠. 2호선 노선도에 시선이 먼저 가고 그 다음에 자신이 찾아야 할 역이 있는 노선을 볼 테니까요.”
찾아야 하는 역이 어디든 2호선 노선도를 먼저 본다면 그만큼 시간을 뺏길 수밖에 없다. 이걸 감수하면서 2호선을 강조한 이유가 있다.
권 팀장은 “서울시 한가운데에 원을 넣은 이유는 이 원을 기준으로 방위를 찾으라는 의도”라며 “자신이 찾아야 할 역이 원을 기점으로 어디에 있는지 생각하며 더 직관적으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노선이 세 개 이상 지나가는 주요 환승역들은 원을 기점으로 한눈에 보이도록 디자인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일부러 시선을 끌지 않도록 개선된 부분도 있다. 기존 노선도에서는 노선이 꺾이는 각도가 제각기 달랐다. 권 팀장은 “이 각도가 정돈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정보를 읽지 않고 뾰족한 예각에 집중한다(이전 노선도의 홍대입구-공덕 사이구간이 신경쓰이는 것처럼!)”면서 “8선형 방식을 이용해 노선이 꺾이고 교차하는 각도를 맞춰줘야 지도 속 정보가 눈에 들어온다”고 설명했다.
8선형(Octoliner) 방식은 영국의 정보 디자이너 헨리 벡이 1933년 영국 런던 지하철에 처음 적용한 체계다. 45도 각도로 뻗은 8개의 선으로 지도를 구성해 노선도 속 노선이 이루는 각도를 정돈할 수 있다.
● 어린이, 노인, 시각약자… 모두를 위한 디자인
서울시는 20~30대 내국인과 외국인을 대상으로 개선된 노선도의 사용성 테스트를 진행했다. 노선도에서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을 안내한 뒤 길을 찾는 데 소요되는 시간과 환승역을 거쳐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찾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각각 측정했다.
아이트래킹(시선 추적) 기술을 이용해 시선이 머무는 곳도 살폈다. 서울시는 “기존 노선도와 개선된 노선도의 소요 시간을 비교했을 때 실험대상이 역을 찾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최대 55%, 환승역을 거치는 길을 찾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최대 69% 단축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공공디자인은 모든 사람이 이용하는 디자인이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정상 시각을 가진 사람이나 색약자와 같은 시각약자나 모두 쉽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권 팀장은 “고려할 부분이 아주 많다 보니, 디자인적으로 아름답게 만들기에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면서 “그러나 많은 사람이 누리고 쓸 수 있는 디자인이라서 가치있고 매력있다”고 말했다.
지하철 노선도는 색으로 노선을 구분한다. 서울시 노선도도 마찬가지다. 1호선은 짙은 파랑, 2호선은 초록 등 각 노선의 색을 따라 길을 찾는다. 그런데 색을 구분하기 어려운 색약자는 노선도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런던 지하철 노선도의 경우 각 노선에 패턴을 부여해 이 패턴을 토대로 노선을 구분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권 팀장이 실제 색약자에게 패턴으로 구분된 노선도를 보여줬더니 “오히려 더 복잡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정보량에는 한계가 있어요. 현재 서울시에 있는 23개 노선에 모두 패턴을 부여하고, 이 패턴을 모두 구분하기란 어렵죠.”
그래서 명도를 조절하는 방식을 택했다. 명도를 조절하면 색약자는 색이 비슷해도 색의 밝기 차로 노선을 구분할 수 있다. 권 팀장은 “공공디자인은 오랜 시간 많은 이가 사용한다는 책임감으로 (노선도 개선에)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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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11월호, [최신 이슈] 40년 만에 달라진 서울 지하철 노선도, 그 뒤에 인지과학이 있다
[김소연 기자 leci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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