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배구자의 ‘빈사의 백조’, 근대 발레의 효시
‘20년전에 놓쳐버린 한 마리의 소조(小鳥)가 비에 젖은 날개를 첫드리고 옛날의 보금자리로 기어들었다. 그러나 주인은 반가히 맞아줄 줄 몰랐다. 자유롭게 날아볼 공간을 주지 않았다.빈사(瀕死)의 백조는 조그만 동무새들을 모아가지고 그 쭉지 떨어진 날개를 펴보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리하야 몇해동안 파득파득 떨다가 그 가느다란 다리를 버티고 일어설만한 무대를 얻은 것이다. 그가 갱생한 배구자요, 그를 중심으로 모인 곳이 순수한 무용단체로는 다만 하나뿐인 그의 연구소다.’(‘새로운 무용의 길로 1-배구자 1회 공연을 보고’, 조선일보 1929년9월22일)
영화 담당기자 심훈(1901~1936)은 종종 무용 기사도 썼다(훗날 소설 ‘상록수’를 쓴 그 사람, 맞다). 1929년9월18일부터 경성 영락정(永樂町·중구 저동)의 극장 중앙관(中央館)에서 올린 배구자무용연구소 제1회 공연을 보고 사흘에 걸쳐 리뷰를 썼다. ‘무용을 잘 알지 못하는 관객의 한 사람’이라고 슬쩍 눙치지만, 영화 ‘장한몽’에서 이수일을 맡았고,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영화 ‘먼동이 틀 때’(1927년)로 주목을 받은 심훈은 남다른 심미안을 지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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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조선의 무용을 만들어달라”
심훈은 배구자를 ‘빈사의 백조’로 빗댄 후, 이렇게 썼다. ‘내가 본 배양(孃)은 ‘째-즈 댄스’나 ‘찰스톤’이나 고전적인 ‘빠레-’를 추는 것보다 서정시적이요, 민요적이요, 소야악(小夜樂)적인 예풍을 가지고 있어서 그 방향으로 진출할 수 있는 소질이 있는 ‘딴서’다. 그럼으로 자아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순수한 조선의 무용을 창작해서 민중에게 보여줄 의무를 져야할 것이다.’
배구자는 이 공연에서 ‘아리랑’ ‘수(水)의 정(精)’을 솔로로 췄는데, 심훈은 한해 전 경성공회당에서 올린 배구자의 ‘아리랑’을 봤던 것같다. ‘향토의 색조가 농후한 작품’이라면서 ‘앞으로 연찬을 거듭할 여지를 보여서 그대로 버려두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창작무용 ‘아리랑’발표
배구자는 1928년 4월21일 경성공회당에서 ‘고별무도회’를 가졌다.당시 경성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공연장이었다. 미국 유학을 앞두고 준비한 리사이틀이었다.(배구자의 미국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신당리에 무용연구소를 열고 제자를 양성하면서 서양춤의 한국적 수용을 모색한다.) 오후 7시30분부터 열린 이 공연은 협연자의 피아노, 바이올린 독주외에 배구자가 부르는 노래 2곡과 무용 7편으로 채워졌다. 배구자는 조선, 일본, 서양춤이 골고루 포함된 소품 7편에 출연했다.
요즘 연구자들이 관심을 갖는 작품은 단연 ‘아리랑’이다. 배구자가 ‘자작자연’(自作自演)한 것으로 소개된 이 작품은 물론 민요 ‘아리랑’에 맞춰 만든 무용이다. 나운규 영화 ‘아리랑’이 1926년 공전의 인기를 누린 2년 뒤 만든 작품이니, 당연히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리랑’은 처음부터 반응이 좋았다. ‘민요곡 ‘아리랑’을 자작한 것은 그 동기로부터 우리는 감사하고 싶다.순진한 시골처녀로 분장하여 아리랑의 기분을 무용으로 나타내었는데 그 얼마는 확실히 성공하였다’(’배구자양의 음악무용을 보고’,중외일보 1928년4월23일)
◇조선인이 올린 첫 발레 ‘빈사의 백조’
‘고별무도회’ 피날레는 발레 ‘사(死)의 백조’였다. 1905년 미하일 포킨이 안무한 ‘빈사의 백조’를 가리킨다. 러시아황실발레단 주역으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안나 파블로바(1881~1931)의 대표작이다. 생상스가 작곡한 관현악모음곡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를 바탕으로 죽어가는 백조의 모습을 표현한 독무다. 강수진 국립발레단장을 비롯한 유명 발레리나들이 사랑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김호연 교수에 따르면, 안나 파블로바는 1922년 9월 7주간에 걸쳐 일본 투어공연에서 ‘빈사의 백조’를 올렸는데, 관객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무용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줬던 모양이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한 배구자도 그 영향을 받았던지, 이 작품을 피날레로 골랐다. 조선인이 이 땅에서 올린 첫번째 발레공연로 손꼽힌다.
배구자가 이 작품을 제대로 소화할 만큼 발레를 익혔는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순백색 튀튀를 입고 토슈즈를 신은 채 무대위에서 죽어가는 백조를 연기했다면 손짓만으로도 관객들에게 정서적 호응을 이끌어낼 수있었을 것같다. ' ‘死의 백조’는 양(孃)도 자신있는 바인 듯하다. 양은 이것으로서 무용으로의 가장 가치많은 것을 보여 주었다’(‘배구자양의 음악무용을 보고’, 중외일보 1928년4월23일)는 리뷰를 봐도 그렇다.
◇이토 히로부미 양녀 배정자의 조카
배구자의 출신엔 미스터리가 많다. 이토 히로부미 양녀이자 정보원인 배정자(1870~1952)의 조카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 이토와 배정자 사이에서 난 사생아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연극학자 유민영 단국대 명예교수는 배구자가 서울토박이 배석태의 딸이고 이토의 사생아란 얘기는 역사적 맥락에 맞지 않는다고 잘랐다. 배구자의 출생연도도 1905년부터 1908년까지 다양하게 나오는데, 1905년생으로 봤다.
배구자는 1915년 경성에 온 일본의 유명 극단 덴카츠(天勝)의 공연을 보고 아버지와 고모를 졸라 입단했다. 3년 뒤인 1918년 경성 공연때 데뷔했다. 10년 넘게 덴카츠의 간판 스타이자 후계자로까지 인정받았으나, 1926년 평양 공연 중 도망나와 탈퇴했다. 신문들은 인기 스타의 야반도주를 대서 특필했다. (’天勝一座의 명성 배구자, 작효 평양서 탈주 입경(入京)’, 조선일보 1926년 6월5일)
그리고 2년 여 잠적했다가 1928년 미국에 건너간다며 ‘고별무도회’를 가진 것이다.
◇민요, 전통춤을 중심으로 일본에서도 공연
배구자는 악극단을 조직, 제자들과 함께 일본까지 활동 범위를 넓혔다. 1932년 일본 최대 연예기획회사인 요시모토 흥행회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교토, 오사카에서 무용과 음악, 연극이 결합된 공연을 올렸다. 1934년 8월18일 오사카에서 가진 자선음악무용대회에선 무용작품으로 ‘답푸’ ‘청춘’ ‘봄이 왔다 봄이 왔다’ ‘샤인’ ‘나는 명랑하다’ ‘어머니와 사랑’ ‘나는 청춘’ ‘월광을 욕(浴)하여’ ‘오리엔탈’과 민요 ‘방아타령’ ‘아리랑’ ‘길경꽃’ ‘백의의 애수’, 독창, 촌극 ‘금색야차’, 동화극 ‘인형의 제(祭)’ 등을 올렸다.(‘구호의 불길은 異域에서도’,조선일보 1934년8월13일) 다양한 레퍼토리를 올렸지만, 일본에선 한국의 민요와 춤이 도드라졌을 것이다.
배구자는 1935년 남편 홍순언과 동양극장을 개관, 우리 연극사에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1937년 남편이 죽고, 재혼한 뒤 동양극장을 매각하면서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다 광복 후 일본에 정착하면서 활동을 마감했다. 이 때문에 최승희에 비해 덜 알려지고, 당대에도 ‘레뷰댄서’정도로 가볍게 취급됐다. 하지만 최근 배구자의 춤세계를 다룬 박사학위 논문도 나오고, 배구자를 재조명한 논문들이 잇달아 발표되고 있다. 배구자는 말년에 하와이에 건너가 2003년 사망했다.
◇참고자료
김호연, 서양 근대춤의 수용과 변용 양상;배구자를 중심으로, 한국학연구 71, 2019.12
서고은, 김경희, 촉접연구를 통한 배구자춤 다시쓰기: ‘사의 백조’를 중심으로, 무용역사기록학 66, 2022
유민영, 신무용개척자 배구자는 누구인가, ‘한국 근대춤인물사’, 현대미학사,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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