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국가경제 좀먹는 영끌 투자 확산 차단해야
10여년 전 취재를 위해 방문한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오후 4시경 부터 시작된 퇴근길 교통체증으로 일정에 늦을까 마음을 잔뜩 졸였다. 한국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이른 귀가가 부럽기도 했고, ‘직원들이 이렇게 일찍 퇴근하는데 어떻게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까?’ 궁금하기도 했다.
비결은 간단했다. 정해진 기간에 해야할 일을 차질없이 마무리할 수 있다면 근무 시간과 장소에 관해서는 큰 제약을 두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노르웨이 직장인들은 오후에 중요한 개인적 용무가 있으면 알아서 새벽같이 출근해 일을 처리하기도 하고,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샌드위치로 때우며 부족한 업무를 보충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퇴근 후 가족과 시간을 보내다 집에 들고 온 일을 처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니 이른 퇴근이 반드시 ‘업무 종료’를 뜻하는 것도 아니었다. 회사나 업종, 개인마다 업무 방식의 차이는 있겠지만, 현지에서 만난 이들의 이야기는 대체로 일치했다(훗날 알게 된 것이지만 덴마크와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 어디나 상황은 비슷했다).
◇ 韓 노동생산성 OECD 바닥권... 행복지수는 60개국 중 57위
노르웨이의 지난해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세계은행 기준)은 약 10만6180달러로 한국(3만2142달러)의 3배가 넘었다. 룩셈부르크(12만5558달러)에 이어 세계 2위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업무를 단시간에 정확히 처리하는 그들만의 특별한 비법이 있을 것 같진 않다. 하루 24시간은 누구에게 똑같이, 공평하게 주어진다. 많은 경우 차이를 만드는 건 목표의식과 집중력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집계한 지난해 한국의 노동생산성(근로시간당 GDP 창출분을 측정한 것)은 37개 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인 33위에 머물렀다. 우리나라의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49.4달러로, OECD 평균인 64.7달러의 4분의 3 수준이었고, 노동생산성 1위 아일랜드(155.5달러)와 비교하면 30% 수준이었다. 독일(88달러), 미국(87.6달러)과 비교해도 절반을 조금 넘는 수준에 그쳤다. OECD 회원국 중 우리나라보다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는 국가는 그리스, 칠레, 멕시코, 콜롬비아 4개국에 불과했다.
경제 수준에 비해 턱없이 낮은 노동생산성은 경직된 노동시장과 과도한 규제 등 다양한 요인과 관련 있다. 1000조원이 넘는 가계부채를 남기며 저금리 시대 대한민국을 온통 휩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 확산도 노동생산성 제고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여유자금을 몽땅 쏟아붓고 큰 빚까지 내서 구입한 아파트나 주식, 코인 가격이 ‘떡상’(급상승)할 날만 오매불망 기다린다면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힐 턱이 없다. 어렵게 취업을 해도 본업을 통한 자아실현과 땀흘려 일해 벌어들인 수입에 대단한 의미를 두진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결국 기업과 국가의 생산성과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 팬데믹 후유증에 생성형 인공지능(AI) 확산이 가져온 급격한 변화,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인한 불확실성 증대 등으로 지금 우리는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다. 산업 전반에 걸친 국가간 치열한 주도권 경쟁으로 반도체와 바이오, 방산 등 무엇 하나 녹록한 분야가 없다. 각 분야의 최고 인재들로 정예부대를 꾸려 전력을 다해도 부족한 상황이다.
◇ 대출규제와 함께 파격적인 주택 공급 대책 고민해야
천문학적인 가계부채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지나치게 희생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다. 미래를 위한 투자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너무 가중치를 두면 현재가 각박하고 불행해진다. 좋은 걸 가지고도 누리지 못한다. 2023년 ‘세계행복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행복지수는 10점 만점 중 6점으로, 조사대상 60개국 중 57위다. 경제 수준과 소프트파워, 국방력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서 대한민국이 전 세계가 인정하는 선진국이 됐는데도 그렇다는 건 심각한 문제다.
한정된 수입에 남들 하는 거 다 하려고 재테크에 과도하게 몰입하면 본업은 물론 가정에 소홀해질 우려도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합계출산율은 0.78명, 신생아 수는 24만9000명으로 역대 최저수준이다. 다 관련이 있다.
미국과 영국의 중앙은행이 최근 기준금리를 동결했지만, 당분간 과거와 같은 저금리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높은 물가상승 압력 때문이다. 이제는 신규 대출에 신중해야 할 때다.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빚을 줄여놓으려는 노력도 필요하다. 정부는 정부대로 파격적인 주택 공급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대출규제만으로 ‘영끌 투자’ 확산을 막기는 쉽지 않다.
비정상적인 영끌 투자 확산을 막고 우리 경제의 골치아픈 뇌관이 된 가계부채를 줄이는 일은 재정건전성과 노동생산성, 기업과 산업 경쟁력, 행복지수와 출산율까지 아우르는 국가 미래와 명운이 달린 중요한 과제가 되어버렸다. ‘영끌 투자’는 투기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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