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 한국이라는 ‘험지’를 선택한 日 바둑 천재 소녀

이홍렬 바둑전문기자 2023. 11. 4.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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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 프로 기사 스미레의 결단
조국 떠나 한국 활동 선언
사회적 위상·수입 日이 높지만
“강자 많은 한국서 성장하겠다”
내년 3월부터 한국에서 활동하게 된 스미레 3단. 10월 30일 도쿄에서 열린 회견에서 “강해져서 돌아오겠다”고 다짐했다. /일본기원

나카무라 스미레(仲邑菫). 일본 바둑 팬들은 이 14세 소녀 프로 기사를 성(姓) 대신 스미레란 이름으로 즐겨 부른다. 어린 나이에 발군의 실력을 갖춘 데다 행동도 깜찍해 아이돌급 인기를 누려왔다. 그 스미레가 내년 3월부터 활동 무대를 일본에서 한국으로 옮긴다. 최근 한국기원이 안건을 통과시킨 데 이어 당사자가 도쿄 회견장에 나와 마무리했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크게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는 인생 유전(流轉)의 세상 이치다. 사람뿐 아니라 특정 국가나 분야의 흥망성쇠가 영원한 것은 없다. 바둑은 일본이 문화적으로 긍지를 크게 갖는 분야 중 하나였다. 막부(幕府) 시대 400여 년에 걸쳐 관직까지 두고 양성한 바둑이 국기(國技)로 자리 잡았고, 그 전통이 20세기 말까지 이어져 일본 국민의 자부심을 지켜주었다.

한국과 일본 간에 얽힌 바둑 역사도 기구하다. 한 대목만 살펴보자. 한국 바둑 여명기인 1962년, 조남철과 벌인 도전기서 석패한 김인 4단이 유학 가자 일본기원은 후지사와(藤澤朋齊) 9단과 2점 접바둑 시험기를 두게 했다. 한국 바둑을 깔본 무례한 조치였다. 완승을 이끌어낸 김인에게 일본은 3단을 인허했다. 김인은 일본의 처사가 부당했음을 눈부신 성적으로 입증했다. 하지만 콧대 높던 일본 바둑은 몇 가지 이유로 1990년대 말부터 몰락, 20여 년째 한중 양국 들러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재기를 위해 머리를 싸매던 일본은 천재 소녀 스미레의 존재를 포착하고 2019년 영재 특별 채용 제도를 도입했다. 자신을 겨냥한 위인설관(爲人設官)식 맞춤 정책으로 열 살 때 프로가 된 스미레는 기대에 200퍼센트 부응했다. 일본 최연소 우승(13세 11개월) 등 종횡무진하며 팬과 보도진을 몰고 다녔다. 하지만 일본이 스미레 프로젝트 대성공에 한껏 고무돼 있을 때 스미레의 한국 이적(移籍) 뉴스가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일본은 각국 바둑 영재들이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고 찾아가는 유학 대상국이었을 뿐, 자국 프로가 공부 목적으로 외국을 찾은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일본 바둑의 수호신으로 떠오른 스미레가 그 주인공임이 알려지자 열도가 발칵 뒤집혔다. “신세를 진 일본기원의 체면을 구기는 행위” “일본에도 고수가 많은데 이적만이 레벨 업 방책은 아니다” 등 반발이 쏟아졌다. 하지만 놀랍게도 비판 여론은 성원 목소리에 빠르게 묻혔다. 스미레의 당당한 자세와 논리가 상황을 국민적 축복 분위기로 반전시킨 것이다.

앞서 꼽은 두 가지 느낌 중 둘째가 이 대목이다. 10대 소녀가 이 정도 열정과 소신과 추진력을 겸비했으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다(하이틴도 아닌 열네 살이다). “더 높은 수준의 환경에서 공부하는 것이 지금의 내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는 데 다른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는가. 부모와 상의는 했지만 결정은 스스로 내렸다고 했다.

프로 기사의 사회적 위상은 아직 일본이 한국보다 높다. 수입 규모도 여전히 일본이 월등하다. 그럼에도 한국행을 결심한 것은 “강자가 많고 다양한 기전에 나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일본서 적당히 안주해도 높은 수입과 인기를 유지할 수 있지만 자신과 조국의 도약을 위해 험지(險地) 도전을 택했다.

스미레는 입단 전 여섯 살 때부터 2년가량 한국서 바둑을 배운 적이 있다. 또래 경쟁자들에게 패할 때마다 펑펑 울어 주변 사람들이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고 한다. 회견에서 그는 “강해져 돌아올 테니 기다려 달라”고 자국 팬들을 달랬다. 국적을 떠나 스미레의 승부사 정신에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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