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267] 개혁·개방 시대의 弔鐘

유광종 종로문화재단대표 2023. 11. 4. 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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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양진경

“십 년을 차가운 창 옆에서 공부했지만 찾아주는 이 없다가, 과거 급제로 이름 내니 세상이 다 알아주다(十年寒窓無人問, 一擧成名天下知)”라는 시가 있다. 오랜 고생 끝에 지도층에 오른 옛 문인(文人)의 경우를 읊은 시구다.

‘차가운 창[寒窓]’에서의 노력은 힘겨운 학습이다. 함께 공부한 사람을 우리가 동창(同窓)이라고 적는 유래다. 글을 습득해 지식을 쌓는 사람, 그로써 옛 사회의 엘리트 반열에 오른 이들의 호칭은 퍽 풍부하다.

재자(才子), 문사(文士), 문인, 유생(儒生), 학자(學者) 등이 다 그렇다. 대부분은 배움에 나선 사람을 우아하게 부르는 아칭(雅稱)이다. 서생(書生)은 그에 비해 배우는 자의 좋은 점이나 그렇지 못한 점을 아우르는 이름이다.

지식 쌓기에 몰두하되 현실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백면서생(白面書生)이다. 서고(書庫)는 본래 ‘책 창고’, 달리 지식을 아주 많이 쌓은 사람이다. 서록(書簏)은 책 상자, 나아가 쌓기만 했지 지식 운용에 무능한 이다. 서치(書癡)는 책에 푹 빠진 지식인, 서충(書蟲)은 잎사귀 먹는 벌레처럼 깊이 독서에 파묻힌 사람, 서미(書迷)는 글에 젖어 헤매는 이를 일컫는다. 현실 대응 능력이 부족한 지식인을 은근히 얕보는 말들이다.

그럼에도 지식과 전문성을 천대하는 사회에 진보란 있을 수 없다. 개혁·개방 시기의 공산당은 이념과 함께 전문성도 중시했다. 그로써 세계가 놀랄 만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이제는 폐쇄적으로 바뀌면서 정치성만 내세운다.

학력과 능력을 겸비했지만 1인 권력에 짓눌려 ‘서생’이라 놀림까지 받았던 리커창(李克强) 전 총리의 사망은 그 상징이다. 그를 향한 중국인의 애도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정작 슬퍼하는 것은 지식과 전문성을 우대했던 개혁·개방 시대의 조종(弔鐘)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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