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삶 속으로 사라지다, 치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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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영원한 이방인'(1995년), '척하는 삶'(1999년) 등을 통해 미국에서 디아스포라 문학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저자의 9년 만의 신작이다.
저자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이기도 한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20대 청년 틸러 바드먼이다.
과거 시점에서 틸러는 부유한 자산가가 몰려 사는 대학도시 '던바'에 살다가 퐁을 만나며 아버지를 떠나 중국 선전, 마카오, 홍콩 등 이국으로 표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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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러는 한국인의 피가 8분의 1 정도 섞여 있지만, 외모로는 혈통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는 자신이 사는 곳을 ‘스태그노’(액체가 고여 흐르지 않는 상태), 즉 어떠한 변화도 없는 고인 물이라 부르며 이곳에서 30대의 미스터리한 여성 벨과 그의 8세 아들 빅터 주니어와 함께 산다.
소설은 틸러가 스태그노에 사는 현재와, 중국인 사업가 퐁 로우를 만나 해외로 떠나는 1년 전 시점을 번갈아 가며 다룬다. 과거 시점에서 틸러는 부유한 자산가가 몰려 사는 대학도시 ‘던바’에 살다가 퐁을 만나며 아버지를 떠나 중국 선전, 마카오, 홍콩 등 이국으로 표류한다. 그 후 벨을 만나고 서로의 과거에 대해 묻지 않은 채, ‘요리 천재’인 빅터 주니어를 따라 밖의 세계로 차츰 나간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틸러가 지겨울 정도로 평온한 세계에 살다가 감각에 이끌려 균형을 깨고 낯선 세계로 자신을 내던진다는 점이다. 과거의 영웅 소설이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도전에 나서는 주인공 서사를 담았다면, 이 소설은 그러한 성취보다 순간의 감각을 앞세운다. 틸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맛보고 탐닉하고 경험하며 자신을 세계 속에 푹 적신다. 작품에서 음식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9년 만의 신작에서 작가는 본질이 무엇인지, 뿌리는 어디에 있는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시대의 새로운 인물 서사를 시도한다. 무언가를 성취하려는 게 아니라, 맛보고 느끼는 살덩이로 살아가는 과정 자체를 찬미한다. “나는 삶으로부터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삶 속으로 사라지고 싶었다”는 말처럼, 세계와 부딪치고 쓰러지는 과정에서 진정한 ‘나’를 찾기를 바라면서.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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