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실장에게 던진 이건희의 티스푼, 질경영 시발점 됐다

2023. 11. 4.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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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신경영 30년, 혁신의 길을 묻다 ② 충격요법으로 저항 극복하라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하는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 삼성전자]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삼성의 주요 임원들 200여 명이 모였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공유할 생각으로 임원들을 먼 곳까지 불렀지만 핵심 임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위기감이 없었다. 회의에 참석했던 현명관 당시 삼성종합건설 사장(후일 삼성물산 회장 역임)의 말이다. “임원들은 얼떨떨해했다. ‘일이 많아 바빠 죽겠는데 프랑크푸르트처럼 먼 곳에 불러 며칠씩 회의를 하다니’라고 투덜대는 사람도 있었다. ‘회사 경비도 돈인데, 그 많은 돈을 이런 데 써도 되나’라는 불만도 나왔다.” 간담회가 시작됐다. 다들 깜짝 놀랐다. 평소 말을 거의 하지 않던 회장이었다. 표정 변화도 거의 없던 회장이 10여 시간을 혼자서 열변을 토했기 때문이다. 회장이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인 줄 다들 처음 알았다.

“티스푼 안 던졌으면 신경영 없었을 것”

현명관 회장이 신경영 초기 회의자료와 메모를 보여주며 김영욱 연구소장에게 설명하고 있다. 최영재 기자
더 큰 충격은 다음에 일어났다. 임원들이 오후에 회장 얘기를 녹음한 테이프를 듣고 있었다. 그날 오전 이 회장이 A 비서실장 및 팀장들과 나눈 대화였다. 이 회장은 품질을 최우선시하는 질(質)경영이 중요하다고 계속 강조했다. A 실장이 나섰다. “회장님, 물론 질이 중요합니다. 하지만 양(量)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질과 양은 동전의 양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임원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렇지,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를 비서실장이 하는구나”라는 분위기였다. 현명관 당시 사장은 이렇게 전한다. “임원들은 A 실장처럼 양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품질 제일주의로 가면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고 봤다. 가령 삼성이 일본 소니와 품질이 비슷하게 만들었다고 하자. 이때 가격을 소니와 비슷하게 매기면 삼성 제품이 잘 팔릴까? 소비자들은 소니 제품을 선택할 것이라는 중론이었다. ‘이러다 삼성이 망하는 것 아닌가. 누군가 충정 어린 조언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임원들도 있었다.” 이런 차에 비서실장이 “양도 중요하다”며 나서자 임원들이 공감한 것이다.

갑자기 녹음 테이프에서 간담회장을 진동시킬 정도로 ‘쨍그랑’ 소리가 크게 났다. 임원들은 다들 귀를 의심했다. 이 회장이 티스푼을 비서실장을 향해 던졌고, 그게 어딘가 부닥치는 소리였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감정이 격해진 듯 언성을 높였다. “내 얘기대로 하면 무슨 손해가 있나? 왜 이쪽으로 총력을 다하지 않나? 전자에 대해 나만큼 아는 사람이 어디 있어? 전자제품을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사고 제일 많이 써본 사람이야. 내가 내 재산 늘리자고 이렇게 밤잠 안 자고 떠드는 건가? 절대로 아니다. 재산 10배 늘어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 명예와 성취감 때문이다. 세계 초일류 기업에 들어가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는 책임감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내 재산, 내 목숨, 내 명성을 다 걸었다.”

200여 명의 임원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현 회장의 이어지는 전언은 이렇다. “나부터가 그랬다. 쨍그랑 소리를 듣고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회장이 진심이구나, 각오가 대단하구나, 자신의 목숨을 걸고 승부를 보려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렇다면 우리도 한번 해보자’는 결심이 절로 일어났다. 다른 임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현 회장은 “만일 그때 이 회장이 티스푼을 던지지 않았다면 신경영은 없었을 것이다. 삼성은 이미 망했든지, 잘해야 세계 3~4위 정도일 것”이라고 단언한다.

누구나 혁신을 시도한다. 하지만 성공한 혁신은 극히 드물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혁신이 실패하는 건 조직 내의 불만과 저항 때문이다. 하지만 혁신의 본질은 과거 부정이다. 그러기에 저항은 필연이다. 혁신의 성공 조건은 자명하다. 조직원들의 불만과 저항을 어떻게 해야 최소화할 수 있을까다. 더불어 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동참하도록 할 수 있을까다. 그렇게 하면 성공한 혁신이 된다. 그렇다면 불만과 저항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뭘까. 충격요법이다. 이 회장은 ‘티스푼 사건’이란 충격요법으로 자신의 개혁 의지를 임직원들에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했다.

화형식 이후 불량률 2%대로 떨어져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 전화기, 팩시밀리 등 불량제품 15만대를 전량 폐기 처분하는 화형식이 열렸다. [사진 삼성전자]
충격이 단발성에 그쳐선 안된다. 지속돼야 한다. 이 회장은 68일에 걸친 신경영 대장정이 8월 4일 끝난 후에도 CEO들을 불러 신경영을 점검했다. 여전히 신경영의 본질을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지금의 조직으로는 혁신을 성공하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이 회장은 1993년 10월 23일 비서실장을 전격적으로 교체한다. 현명관 삼성종합건설 사장이 새 비서실장이 됐다. 비서실은 삼성에서 가장 막강한 조직이다. 회장을 대신해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서실장은 회장의 오른팔이고 그룹의 2인자다. 하지만 현 회장은 전임 비서실장들과 여러모로 대비됐다. 전임들은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커리어를 쌓은 삼성맨이었다. 현 회장은 행정고시에 합격해 감사원에서 근무하다 삼성으로 옮긴 비(非)공채 출신이다. 전임 실장들은 그룹의 주력 계열사에서 승승장구했지만 현 회장은 호텔신라와 삼성시계 등 비(非) 주력계열사에서 근무했다. 사양하는 현 회장에게 “그래서 하라는 것”이라고 했다. 현 회장은 “공채 출신이 아니니 파벌이 없다, 오래 근무하지 않았으니 과거 패러다임에 물들지 않았다, 문화와 전통을 잘 모르니 확 바꿀 수 있다고 본 듯하다” 고 회고했다. 삼성 임직원들은 전격적인 비서실장 교체에 큰 충격을 받았다.

충격요법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추진력이 떨어질 때마다 처방전이 나왔다. 계열사의 관리본부장 전원을 현업에서 빼내 짧게는 두 달, 길게는 1년씩 경기도 용인의 삼성 연수원으로 교육을 보냈다. 일대 사건이었다. 삼성은 전통적으로 관리본부장의 파워가 막강했기 때문이다. 재계에서 ‘관리의 삼성’이라고 부를 정도로 삼성은 인사와 재무 등 관리가 셌다. 관리본부장은 각 계열사의 2인자였다. 삼성을 국내 일등으로 키우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었다. 삼성이 일등을 한 건 다른 기업보다 많은 돈을 빌려 다른 기업보다 먼저 공장을 지어서 물건을 만든 때문이 컸다. 수요보다 공급이 크게 부족했으니 조악한 제품도 만들기만 하면 팔려나갔다. 기술이나 마케팅보다 관리가 훨씬 강한 이유였다. 세무서를 잘 구슬려 절세하고, 정부 관리들과 네트워크를 돈독하게 쌓아 남보다 먼저 인가받아 신산업에 진출하거나 공장을 설립한 덕분이었다. 그 주역이 관리본부장이었다. 문제는 이들이 ‘질보다 양을 중시한’ 과거 성장 패러다임의 모델이라는 점이다. 관리본부장이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선입관도 있었다. 이 회장은 일거에 불식시켰다. 두 달 이상 이들을 현업에서 뺐다. 그래도 회사는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더 잘 돌아갔다. 현 회장은 “과거 패러다임이 잘못됐다는 걸 전 임직원들에게 확실히 보여줬다”고 말했다. 신경영에 대한 의구심과 저항감이 크게 줄었다.

1995년 3월 9일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 있었던 불량 무선전화기 화형식도 충격요법이었다. 지금도 회자되는, 우리나라 전자산업 사상 가장 유명한 사건 중 하나다. 이 회장은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고 생각했다. 반도체와 더불어 무선전화기를 삼성의 미래 먹거리로 정해 1993년부터 생산하고 있었다. 문제는 불량률이었다. 100대를 만들면 12대가 불량품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개선되지 않았다. 이 회장이 대로(大怒)했다. “돈 받고 불량품을 만들어 파는 건 사기”라면서 판매된 무선전화기를 모두 리콜하고 수거한 제품은 몽땅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2천여 명의 구미공장 임직원들이 지켜 보는 가운데 운동장에 쌓여 있던 불량 제품들을 불태웠다. 화형식 이후 무선전화기의 불량률은 2%대로 떨어졌고, 7년이 지난 2002년 삼성의 무선전화기는 세계시장 점유율 3위를 차지했다. ‘양(量)이 아닌 질(質) 경영’에 대한 이 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경영실적으로 드러난 또하나의 충격요법이었다. 하지만 충격요법이 매우 중요하다고 해도 혁신은 충격으로만 성공하지 않는다. 충격요법은 신경영의 두 번째 성공 조건일 뿐이다. 필요조건이긴하지만 그것만으론 충분조건이 안된다는 이야기다.

※정리: 김영욱 기업과 제도연구소 대표·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현명관 1993년 6월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시작할 당시 삼성종합건설 사장이었다. 이후 이건희 회장 비서실장을 거쳐 삼성물산 대표이사 회장으로 승진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현 한국경제인협회) 상근 부회장과 한국 마사회 회장을 지냈다. 신경영 초기의 자료를 중앙SUNDAY에 제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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