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틀고 여종업원이 서빙…화신식당 ‘조선 난찌’ 인기

2023. 11. 4.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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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문화의 기록장 ‘종로 모던’] 화신백화점의 조선음식
1937년 종로 네거리 오른쪽 모퉁이에 개장한 6층짜리 화신백화점. 당시에는 전국 최고층이었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1934년 발행한 『화신』이라는 화신백화점 홍보 책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린다.

“종로의 명물이 화신이라면 화신의 명물은 식당이라고 하여도 무방하겠습니다. 화신식당의 명물은 조선요리입니다. 서양요리와 일본요리도 있습니다마는 깨끗한 자리와 그릇에 먹음직하게 조선요리를 제공하는 집은 경성 시내 화신 한 집밖에 없습니다.”

화신백화점이 종로의 명물인데, 화신백화점의 명물은 식당이고 특히 조선요리라고 소개했다. 화신백화점에서 만든 책자라서 그렇겠지만 자랑이 대단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이 자랑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옆의 이미지처럼 화신백화점은 종로 네거리의 오른쪽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종로는 조선시대부터 운종가로 불리며 비단·모시·면포 등을 팔던 행랑들이 이어진 곳이었다. 식민지 시대에도 종로 1정목에서 3정목까지는 내로라하는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1937년 12월 『조선일보』에는 이선희의 ‘여인명령’이라는 소설이 연재된다. 소설에서 화신백화점 점원으로 일하는 ‘숙채’는 화신백화점의 모습을 ‘45도로 기울어진 6층 건물의 그림자가 종로 거리를 온통 뒤덮는다’고 했다. 높은 건물이 드물던 당시에 6층 높이로 우뚝 솟아 있었던 백화점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미쓰코시백화점 등선 조선음식 안팔아

화신백화점 내부의 식당 모습. 조선런치가 인기 메뉴였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화신백화점이 조선인을 고객으로 했다는 점에서 본정에 위치했던 미쓰코시(三越), 조지아(ジョージア), 미나카이(三中井) 등의 백화점보다 뒤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937년 6층 규모의 신축 건물이 들어선 후 화신백화점의 모습은 그런 편견과는 거리가 멀었다. 새롭게 개장하면서 층별로 다양한 매장이 들어섰는데, 층별로 상품을 구분하고 또 같은 층에 여러 매장이 들어선 모습도 백화점에서 처음 선보인 방식이었다.

화신백화점은 경성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데다가 최신 시설을 자랑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입구에서 3층까지를 연결하는 에스컬레이터로, 조선에서 처음 설치된 것이었다. 그런데 화신백화점 식당의 의미는 최신 시설을 갖춘 대형 백화점에 위치했다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식민지 시대 종로통을 가운데 둔 골목 안에는 조선음식점이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조선음식은 설렁탕을 비롯해 장국밥·냉면·비빔밥·떡국·만둣국 등이었다. 채만식 소설 『금의 정열』에는 ‘상문’이 이문식당을 찾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문식당은 지금도 이문설렁탕으로 영업하고 있는데, 당시에는 화신백화점 뒷골목에 있었다.

상문은 고춧가루 한 숟갈, 파 두 숟갈을 넣고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추어 설렁탕을 맛있게 먹는다. 그런데 『금의 정열』에서는 설렁탕 맛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그 내부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철저하게 지저분한 시멘트 바닥, 행주질이라고는 천신도 못 해본 상 바닥, 질질 넘치는 타구 등등 족히 대규모의 쓰레기통으로서 손색이 없다.

화신백화점에 설치된 조선 최초 에스컬레이터를 소개한 1939년 4월 12일자 『매일신문』 기사.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매일신보』나 『동아일보』에도 조선음식점에서는 먹고 난 그릇을 제대로 씻지 않거나 먹다 남은 김치를 다시 내놓는 등 비위생적이라는 기사가 자주 실렸다. 또 식탁 역시 높이가 한 자밖에 안 되는 데다 목침 높이만 한 걸상에 주저앉아 먹어야 해서 불편하기도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종로에는 명월관·식도원·태화관 등 조선요릿집도 자리 잡고 있었다. 조선요릿집에서는 보통 주주총회·환영회·환송회 등 명목상의 회의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연회가 이어졌다. 연회에는 술이 빠지지 않았고 기생도 마찬가지였다. 술과 기생이 함께하는 공간이었음을 고려하면, 조선요릿집에서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기는 망설여졌을 것이다.

본정 근처에 있었던 미쓰코시·조지아·미나카이 등의 백화점 식당은 어땠을까? 1936년 12월 김웅초는 『조선일보』에 ‘성녀 씨’라는 소설을 연재했는데, 거기에는 ‘성녀 씨’가 백화점 식당에서 간 장면이 나온다. 칼과 삼지창을 양손에 들고 서양요리를 먹는데 뭔가 불만이 가득하다. 그러고는 차라리 냉면이나 비빔밥을 사줬으면 비위에 맞았을 것이라고 토로한다. 성녀 씨가 간 곳은 위의 백화점 가운데 하나였나 보다.

필자는 『경성 맛집 산책』이라는 책에서 본정에 위치한 백화점들과 화신백화점의 차이에 대해 살펴본 바 있다. 본정 근처의 백화점들은 서양음식, 일본음식, 심지어 중국음식도 판매했지만 조선음식은 메뉴에 없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백화점에 자리 잡은 식당이었지만, 거기서도 식민지라는 멍에는 작용하고 있었다.

화신백화점에서는 1933년 4월 ‘화신대식당’이라는 간판을 내건 후 ‘조선요리부’를 신설해 조선음식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서양음식을 먹는 데 불편을 느끼던 손님들이 많았음을 고려하면 효과적인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화신백화점 식당에서 조선음식을 제공한 것은 깨끗하고 편안한 식당에서 조선음식을 먹기 원하는 손님, 특히 가족 단위 손님의 요구에 적절히 부응하는 것이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구보 씨가 화신백화점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한 행복해 보이는 가족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화신』이라는 책자에서 정갈한 자리와 그릇에 맛있는 조선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은 화신백화점뿐이라고 했던 언급은 여기서 온전한 의미를 얻는다.

이태준·박완서 소설에 당시 식당 묘사

이태준의 소설 『딸 삼형제』에는 필조와 정매가 비를 피해 화신백화점에 들르는 장면이 나온다. 필조는 정매에게 마음이 있었던지 식권을 두 장 샀다며 같이 밥을 먹자고 제안한다. 화신백화점 식당은 입구 진열장에 음식 샘플을 진열해 놓고 옆의 계산 부스에서 식권을 파는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식당에 들어서면 축음기에서는 재즈나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와 우아한 분위기를 더했다. 또 유니폼을 입은 10대 여자종업원의 서빙을 받으며 여유 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화신백화점 식당에서는 어떤 조선음식을 팔았으며, 또 가격은 얼마였을까? 1930년대 중반을 기준으로 하면 신선로백반·전골백반·화신탕반·비빔밥이 대표메뉴였다. 가격은 신선로백반이 60전이었고, 전골백반이 40전이었다. 화신탕반과 비빔밥은 둘 다 25전이었다. 약과와 청주도 팔았는데, 가격은 20전이었다.

하지만 화신백화점 식당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음식은 조선런치였다. 런치는 이름처럼 점심시간에 한정해서 판매했던 메뉴로, 채만식의 『태평천하』에서 기생 춘심이 윤 직원에게 ‘미쓰꼬시’에 가서 사달라고 한 ‘난찌’가 바로 그 음식이다. 남촌에 있던 백화점 식당에 가면 으레 런치를 시켰던 것처럼 화신백화점 식당을 방문하는 손님들은 조선런치를 주문했다.

조선런치가 어떤 음식으로 구성되었을지 추정해 보자. 밥과 김치, 나물 등 반찬 몇 가지는 공통적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 외에는 전골·구이·찜·탕반 가운데서 두세 종류 정도를 제공했으리라 생각된다. 조선런치의 가격은 35전으로 40전에서 50전 정도했던 일반 런치보다 조금 쌌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1만7000원이 조금 넘는 가격이었다.

화신백화점 식당에서 손님들이 가장 즐겨 찾던 메뉴는 조선런치였으며, 그것은 남촌에 있던 백화점의 런치를 변용한 음식이었다. 그렇다면 조선런치는 화신백화점이 남촌에 위치한 백화점의 시스템을 조선인들에게 적용시켰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메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화신백화점과 그 식당의 의미를 가릴 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화신백화점 식당의 모습은 박완서의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도 나온다. 박완서가 숙명여고보에 합격하자 오빠가 밥을 사주겠다며 그녀를 화신백화점에 데리고 간다. 그런데 당시 화신백화점 식당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식사를 하기 위해 아래층에서부터 온종일 줄을 섰다고 한다. 작가는 화신백화점 식당을 오랜 기다림과 함께 깨끗한 식탁보, 접시에 담긴 수프, 주먹만 한 빵 두 개로 기억한다고 말한다. 작가의 기억 속에 자리 잡은 깨끗한 식탁보, 수프와 빵은 종로의 모던 음식이 지닌 아우라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현수 성균관대 학부대학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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