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관객 고작 3208명, 홍상수 신작 ‘우리의 하루’는 무얼 말해주나<2>
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20번째 레터는 어제에 이어 홍상수 감독의 30번째 영화 ‘우리의 하루’입니다. 어제 1편을 못 보신 분이라면 아래 링크를 먼저 읽어봐주세요.
[그 영화 어때] 관객 고작 3208명, 홍상수 신작 ‘우리의 하루’는 무얼 말해주나<1>
어제 말씀드렸듯, 저는 최근에 홍상수 감독의 29번째 작품 ‘물안에서’와 30번째 신작 ‘우리의 하루’을 연달아 봤습니다. ‘물안에서’의 마지막 2분30초는 놀랍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 전에 미리 대사로 의미를 짚어주던군요. 오오. 이렇게나 친절해진 홍상수라니.
물론 달라졌다곤 해도 홍상수는 홍상수. 예전 그대로인 부분도 있죠(25년 전 ‘강원도의 힘’의 금붕어가 생각나더군요). 하지만 즉석에서 삐뚤빼뚤 휘갈겨 써서 건넨 암호 쪽지 같던 예전에 비하면 훨씬 또박또박 분명한 문체로 명료하고 솔직하게 관객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옥희의 영화’(2010) 이후 오랜만에 그의 작품을 찬찬히 감상한 저의 기준이라는 점, 다시 말씀드리며.
‘우리의 하루’에서 ‘우리’는 너와 나, 우리이기도 하지만, 영화에 나오는 고양이 이름이기도 해요. 여자 주인공은 배우 김민희, 남자 주인공은 배우 기주봉입니다. 김민희의 극중 이름은 상원이고, 기주봉의 이름은 홍의주. 그런데 누가 봐도 ‘40대 배우’로 설정된 상원은 실제 김민희 같고, ‘70대 시인’으로 설정된 기주봉은 홍 감독 같습니다. 심지어 성(姓)도 홍이죠. 어느 정도 극화된 부분은 있겠지만, 저는 기주봉이 홍 감독으로 보였습니다.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홍 감독과 마주 앉아 인터뷰를 하는 느낌까지 들었어요.
김민희와 기주봉은 같은 장면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어느 하루 둘의 일상을 교차해 보여줘요. 그런데 각자 떨어져 지나는 그 하루가 어쩐지 떨어져 보이지 않습니다. 이를 테면, 기주봉은 첫 장면에서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 먹습니다. 김민희도 다음 장면에서 라면에 고추장을 풀어 먹습니다. 옆에 있던 지인이 “원래 이렇게 먹었어?”라고 묻죠. 김민희의 대답 “아니, 가끔 이렇게 먹게 되더라. 나 아는 사람이 맨날 이렇게 먹었어. 있어,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기주봉임을 짐작케하는 열쇠가 이후에도 여러 개 등장합니다. (홍 감독은 공식자료에 나온 짧은 설명에서 ‘라면에 고추장을 넣어 먹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기까지 해요. 둘은 무관한 사이가 아니란 거죠.)
어느 장면에선 김민희가 자고, 다음 장면에선 기주봉도 잡니다. 그리고 고양이 우리도 잡니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는 너와 나, 우리(고양이 이름이기도 한)가 되고, 떨어져 보낸 하루라 할지라도 ‘우리의 하루'가 됩니다. 사람과 사람은 어느 땐가 공유했던 희미하고 사소한 습관에 의해 알 수 없는 힘으로 연결돼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거죠.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절대 만나지 못해도. 그런 게 우리의 관계이고, 인생이라고 홍상수는 말합니다.
제가 좀전에 ‘홍 감독과 인터뷰하는 느낌’이라고 말씀드렸죠. 기주봉을 좋아한다고 찾아온 젊은이가 묻습니다. “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시집도 안 팔리잖아요.” 기주봉(즉, 홍상수)가 답합니다. “자긴 읽었잖아. 그럼 된 거지. 누군가 읽으면 된 거지. 좋으니까 읽었을 거 아냐.” 그의 영화를 봐주는 관객을 말하는 걸까요. 기주봉은 말합니다. “딸 있지. 얼마나 예쁜대. 잘났어. 근데 안 보구 살아. 이혼하면서 엄마 쪽으로 붙었어. 오래 됐어.” 그런데 홍 감독도 실제로 딸이 있습니다. 굳이 저런 대사를 넣었네요. 기주봉을 본인으로 봐달라는 뜻인 걸까요.
‘인생은 이유를 모르면서 나가는 겁니까’라는 질문에 기주봉, 그러니까 홍상수는 말합니다. “진실하게, 진리에 근거해서 살면 된다”고. 이하 시인과 젋은이의 대화입니다. (굵은 글씨가 시인, 즉 홍상수의 말이에요)
“사는 게 너무 짧아. 걱정하지 말구. 금방 죽어. 금방 끝나. 그러니까 그 사이를 뭘로 채울까만 생각해.”
“사는 건 뭡니까.”
“정답을 찾는 거잖아. 너가 말하는 건. 정답이 너무 많아. 책마다 있어. 그건 다 오답이지. 그러니까 우리가 어색하고 어설프고 어중간하잖아. 살아있으면 영원히 모르지. 미리 알 수 없고 영원히 알 수 없는 거지. 그래서 너무 좋잖아.”
“진리는 뭡니까.”
“같은 말 계속 하는구나. 오답이라니까. 진리란 오답들 사이에서 헤매는거야. 우린 찾을 능력이 안 돼. 작은 것에 감사하는 거야. 앞에 있는 걸 능력되는만큼 좋아하고 감사하고, 뜻을 찾지마. 그건 비겁함이야. 그냥 물로 뛰어들어. 다 알고 나서 들어가려하지 말고. 비겁하게.”
네, 이 대사를 여러분께 전달드리고 싶어서 어두운 영화관에서 열심히 받아적었네요. 지금 자판에 옮기면서 다시 읽어보니, 역시나 너무도 홍상수스럽군요. 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기주봉이 젊은이에게 “정말 알아들었나? 알아들었냐구? 이해했나? 이해는 관두구 알아들었냐구?”라고 묻는데 뜨끔했습니다. 저한테 하는 말 같아서요. 관객 모두에게 하는 말일지도요.
기주봉은 건강이 좋지 않아 의사가 술담배 금한 걸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첨엔 무알콜 맥주를 마셔요. “너무 좋다, 진짜 같다”면서요. 그런데 대화에서 기주봉이 강조하는게 뭡니까. 솔직함, 진실함이죠. 솔직하고, 진실하게 ‘금방 끝나버릴’ 인생을 채우기로 한 듯, 기주봉은 의사가 오답이라고 지정한 술, 치킨, 담배를 꺼내놓습니다. 저 위 사진의 표정을 보세요. 진실하게, 비겁하지 않게. 짧은 인생을 채우겠다는 선언 같지 않나요.
홍상수의 영화가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느끼신다면 그 느낌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감탄스러운 게 아닐까요. 그렇게 지루하고 재미없는데, 다 보고 나면 마음에서 계속 울리거든요. 이런 감독이 몇 명이나 될까요. 저는 ‘우리의 하루'가 말해주는 게 그거라고 생각합니다. 3000명이 보더라도 홍상수는 홍상수다. 아직도, 여전히, 앞으로도.
홍 감독은 유난히 베를린영화제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의외로 칸 영화제 상복은 없어요. 베를린에서는 2020년부터 내리 3년간 2등상인 은곰상을 받았습니다. 내년에도 신작으로 다시 베를린을 찾을까요. 그가 원하는 명예를 가질 수 있을까요. 그의 31번째 영화를 기다리며, 오늘은 여기까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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