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티켓 찾아 삼천리

2023. 11. 3.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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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세 현역 지휘자 블롬스테트
코로나 해제 후 공연 보기 위해
표도 못 구한채 도쿄로 날아가
우여곡절 끝 만난 무대 더 감동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는 말이 있다. 예술세계는 아무리 갈고닦아도 끝이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수명은 터무니없이 짧은 것이다. 마침내 한 예술가가 거장의 경지에 이를지라도, 그가 보여 줄 수 있는 퍼포먼스는 길지 못하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오랜 시간을 현역 지휘자로 일하며, 새로운 예술세계를 보여 주는 지휘자가 있다. 바로 헤르베르트 블롬스테트다. 그는 1927년생이고, 한국 나이로 하면 97세다.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며, 인간 수명의 한계로 미처 가 보지 못한 예술의 영역에 다가가고 있는 지휘자다.

그러던 중 전 세계를 멈추게 해 버린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야속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공연장은 운영을 멈춰야 했다. 블롬스테트에게도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인간에겐 결국 기대수명이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 봉쇄된 국경이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했다. 블롬스테트를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도시를 서둘러 알아봤다. 2주 후 도쿄였다. 그는 NHK교향악단과 오랜 교류를 맺고 있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공연이 임박했기 때문에 무작정 NHK교향악단에 전화부터 걸었다. 당연히 티켓은 없었다. 이제 다른 방법이 없다. 공연 당일 공연장 앞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일본은 한번 구입한 티켓을 취소하기가 어렵다. 공연 하루 전날까지면 언제든 취소가 가능한 우리나라와는 사정이 다르다. 그래서 일본의 공연장 앞에선 티켓을 사고파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여기에 참전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오로지 블롬스테트를 위해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서울에서 도쿄까지 약 1200㎞, 3000리 거리였다. 그 먼 과거에도 바흐는 그가 좋아하는 오르간 연주자 공연을 보러 400㎞를 이동했다는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나리타공항에 도착 후, 공연장이 있는 시부야로 서둘러 향했다. 우선 공연장 앞에서 나의 티켓 구매 의사를 알리기 위해, 팻말이 될 A4용지가 필요했다. 일본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호텔 직원에게도 글자를 다시 확인했다. ‘티켓 삽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난관이었다. 공연장 앞에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매진된 티켓을 구하러 온 일본인이 많았다. 그들에게도 블롬스테트는 오랜 시간 끝에 다시 만나는 예술가였다.

그 앞에서 쭈뼛거리자, 그들은 서울에서 날아온 나를 격렬히 환영해 줬다. 한국의 지휘자 정명훈을 좋아한다며 말을 걸었다. 건투를 빌며 서로를 응원했다. 사랑하는 음악 앞에 국경은 없었다. 심지어 그들은 일본어가 부족한 나를 위해, 내가 공연 티켓을 구할 때까지 끝까지 함께했다. 그렇게 우리 모두 운 좋게 공연장에 입장했다. 긴 코로나19의 터널을 지나, 블롬스테트가 무대로 다시 나오는 순간은 아직도 잊기 어렵다. 진짜로 다시 만났구나.

공연은 무척 훌륭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기대보다 더 감동이었다. 지금까지 본 공연 중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공연이 되었다. 그날 블롬스테트가 선보인 작품은 작곡가 말러의 마지막 교향곡이었다. ‘죽음’과 관련된 교향곡인데, 심지어 마지막 악장엔 ‘죽어가듯이’라는 지시어가 붙어 있다. 이날 공연에선 죽음의 공포는 생생하게 묘사되었으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는 덤덤하게 표현되었다. 이것이 블롬스테트가 ‘죽음’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고, 그토록 오랜 시간을 살아왔기 때문에 가능한 경지였다.

이 공연이 더욱 감동적으로 느껴졌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공연이 오히려 귀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오랫동안 공연이 열리지 않았고, 거기에 우여곡절 끝에 만난 음악은 더욱더 감동이었다. 지금은 단 한 번의 클릭으로 전 세계에서 어떤 공연을 하는지 알 수 있는 시대다. 도시마다 하루에도 동시에 여러 군데서 훌륭한 공연들이 펼쳐진다. 특히 한국의 11월 라인업은 정말 화려하다.

반대로 오페라 하나를 보면 축복인 시대도 있었을 것이다. 언급한 것처럼, 바흐는 좋아하는 연주자를 보기 위해 400㎞를 걸었다. 그렇게 만난 공연은 과연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풍부한 문화생활이 가능한 시대에 뜻밖의 의문이 들었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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