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위험 때 ‘작업중지권’은 누구의 권한인가
독극물 누출에 동료 대피시켰다 징계…노조 간부 5년째 취소 소송 중
작업중지권 행사 정당성 여부가 재판 쟁점…1·2심은 사측 손 들어줘
9일 대법원 선고 앞두고 노동계선 “위험 판단 주체, 폭넓게 인정해야”
2016년 7월26일 오전 7시56분쯤, 세종시의 산업단지 내 한 공장에서 화학물질인 티오비스 누출 사고가 발생했다. 티오비스는 공기 중에서 황화수소로 변질돼 사람이 들이마시면 눈·코·목·피부에 자극을 일으키거나 마비를 줄 수 있는 유해물질이다. 곧이어 출동한 소방본부는 공장 마당에서 ‘사고지점으로부터 50m 거리까지 대피하라’고 방송했다. 노동자 30명이 병원으로 이송됐다.
A씨는 화학물질 누출사고 지점으로부터 200m 내의 공장에 있었다. 노동조합 지회장인 A씨는 회사에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대피명령을 내리지 않는 이유를 질의했다. 소방본부에는 화학물질이 인체에 유해한지도 물어봤다. 회사의 별다른 조치가 없자 오전 10시30분쯤 A씨는 조합원들에게 작업을 중단하고 대피하라고 지시했고 조합원들은 함께 대피했다.
문제는 이후 회사의 조치였다. 회사는 A씨에게 정직 2개월의 징계처분을 했다. 징계 사유는 작업장 무단 이탈, 허위사실 유포였다. 이에 A씨는 2017년 3월 회사를 상대로 징계처분 취소소송을 냈다. 재판 쟁점은 A씨의 대피 지시가 산업안전보건법상에 규정된 ‘작업중지권’의 정당한 행사였는지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근로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며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규정한다.
1·2심 법원은 모두 회사 손을 들어줬다. 1·2심 재판부는 A씨가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만한 급박한 위험이 없었다며 징계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이들 재판부는 사고발생 공장에서는 방제작업자들이 방제복·방독면을 착용했으나 재난지휘통제소에 있던 소방관 등 나머지 사람들은 방독면을 필수적으로 착용하지 않았던 점, 사고지점으로부터 반경 10m 이상 거리에서 황화수소가 검출되지 않은 점, A씨 회사는 위험성이 높지 않아 소방본부가 대피방송을 안 한 점 등이 근거였다.
A씨는 회사가 사고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상태에서 악취가 났고 일부 노동자들이 구토와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등 급박한 위험이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1·2심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A씨가 소송을 제기한 지 5년7개월여 만인 오는 9일, 대법원 1부(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상고심 선고를 할 예정이다.
노동계에서는 이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면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이 형해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산재 사고 위험을 예방하고 대처하자는 게 작업중지권의 취지인데 노동자들이 적법성의 틀에 갇혀 작업중지권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개별 노동자는 긴급한 사고 상황을 정밀하게 알기 어렵다는 점에서 급박한 위험의 판단기준을 지나치게 좁게 해석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으로 최근 대기업들은 산재 사고 처벌제도가 강화되자 위험 예방의 사전 조치로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행사를 장려하기도 한다. A씨를 대리하는 이두규 금속노조 법률원 변호사는 “더 이상 누군가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는 작업중지권을 강하게 보장할 필요가 있고, 대법원이 내릴 판단이 안전한 노동환경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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