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세탁기의 가정화
새로운 기술이 확산할 때, 우리는 흔히 그 기술의 내재적 속성을 확산의 동력으로 말한다. 예를 들면, 챗GPT나 아이폰의 세계적인 확산은 기술적 성취에 따라오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새로운 기술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훨씬 더 복잡하다. 가정은 오랫동안 새로운 기술이 친숙한 것으로 자리 잡기 위한 주요한 거점이었다. 기술 연구에서는 새로운 기술이 가정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기술의 가정화’(domestication of technology)라고 표현한다. 이는 야생 동물이 가축으로 길들여지는 것을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는 과정에 비유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 호황 속에서 구축된 새로운 근대적 가정은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와 같은 가정용 신기술의 도입과 긴밀하게 맞물려 구성됐다. 이러한 기술은 핵가족 중심의 가족 실천과 가족 관계를 조립하는 주요한 요소였다. 미디어 학자 임종수에 따르면, 한국에서 텔레비전은 ‘안방 문화’와 결합하여 수용됐다. 당시 한국에서 안방은 부부의 사적 공간이라기보다 가족들이 모이는 공간이었다. 서구 사회에서 텔레비전이 거실이라는 가족 공간에 자리 잡았다면, 한국에서 초기 텔레비전은 안방을 차지했다. 가족들이 안방에 밥상을 차려 식사하며 보거나, 이불을 함께 덮고 시청했다. 당시 영화를 보여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명이 <안방극장>이었던 것도 이러한 문화를 반영한다. 텔레비전의 가정화에 대한 연구들은 리모콘이 가부장제의 상징물이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아버지가 집에 있는 시간에는 대부분 채널 선택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텔레비전은 가부장적 질서와 큰 마찰 없이 단시간 내에 수용됐다.
한국에서 세탁기의 가정화도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진행됐지만, 그 양상은 사뭇 달랐다. 텔레비전이 안방의 영역에서 가부장적 가족의 여가를 대체하는 기술이었다면, 세탁기는 부엌의 영역에서 여성의 노동을 대체하는 기술이었다. 디자인 연구자 박해천에 따르면, 세탁기는 1960~1970년대 한국 가정에 자리잡기까지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박해천은 세탁기가 한국 가정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던 여러 가지 요인을 설명한다. 먼저, 당시 고가의 세탁기를 살 수 있는 경제력을 지녔던 상류층 사람들은 대부분 식모를 집에 두고 있었다. 따라서 식모라는 값싼 노동력을 굳이 비싼 기술로 대체할 필요를 못 느꼈다. 또한 당시 한국의 보편적인 주택은 세탁기를 놓기에 적합하지 않은 구조였다. 이후 세탁기의 확산은 식모의 소멸, 아파트의 보편화, 핵가족 중심의 신중산층 확산과 맞물려 이루어진다. 도시에 젊은 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아지며 식모로 일하던 여성들이 도시로 떠나고, 당시 새롭게 부상한 핵가족 중산층은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지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여전히 가사 노동은 가정주부가 당연히 가족들을 위해 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다. 서구에서 페미니즘 운동의 열풍 속에서 “기술이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해방시킬 것이다” 선전과 함께 가정용 기술장치들이 급속하게 확산된 것과 달리, 한국에서는 여전히 주부가 가사노동을 하지 않고 여가를 즐기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광고는 1970년대 후반 세탁기를 주부의 가사노동을 제거하는 기술이 아닌, 새롭게 부상한 주부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드는 장치로 의미화했다. 즉, 빨래는 세탁기에 맡기고, 그 시간을 자녀 양육과 ‘스위트홈’을 구축하는 데 사용하라는 것. 이로써 세탁기는 가정주부에게 부여된 오래된 노동과 새로운 노동을 함께 수행할 수 있는 기술장치로 자리 잡는다. 이는 아이들이 “옷이 더러워질까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뛰어놀게”하는 새로운 부모 노릇 하기 실천과 결합했다.
채석진 조선대 신문방송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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