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아픔의 문체
질병이란 반갑지 않은 방지턱
바이러스가 전하려는 말은
무리하지 말라는 꾸지람 같다
며칠 전 대상포진에 걸렸다. 왼쪽 다리에 조금 특이한 발진이 보이더니, 온몸이 몸살감기에 걸린 것처럼 아팠다. 도무지 책상에 앉아 글을 쓸 수 없었다. 병원에 가서 대상포진을 진단받고 항바이러스제와 중증 진통제가 포함된 약을 꼬박꼬박 먹었다. 오랜 시간 꿀을 넣은 홍차로 아침 식사를 대신했기에, 눈 뜨자마자 밥을 챙겨 먹는 일부터 곤욕이었다. 약이 독해서 속이 울렁거리거나 어지러울 거라는 의사의 말대로 나는 두통과 메스꺼움, 흠씬 두들겨 맞은 듯한 근육통에 시달리며 일주일을 통째로 앓았다. 지금도 양어깨를 쿡쿡 쑤셔대는 통증과 함께 이 글을 쓰고 있다. 이렇게 내가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 '아픔의 문체'가 아닐까 생각하며.
우선, 아픔은 고백하게 만든다. 몸의 상태나 내 처지에 관해 최대한 진솔하게 그리고 담백하게 상대에게 전하는 방법을 익힌다. 병이 찾아온 얼마간 나는 이메일을 보낼 때 '제가 몸이 아파서 답신이 늦었습니다'라고 첫인사를 건넸다. 타인의 양해를 구하는 말은 때론 어찌나 꺼내기 어려운지, 그러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다른 이의 이해에 기대어 사는지 나는 여러 번 느꼈다.
또 아픔은 삶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하루의 일과를 약 먹는 주기로 다시 조직하는 것은 기본이고, 나의 직업인 '읽고 쓰는 일'이 아픔을 기준으로 단출하게 바뀌었다. 책을 봐도 오래 집중할 수 없어서 이전처럼 책 더미를 쌓아두고 일거리를 해치우듯 속독할 수 없었다. 정말 읽고 싶은 책을 한두 장 천천히 읽고 난 다음, 가만히 드러누워 그 구절을 되새길 여백이 필요했다. 글을 쓸 땐 복잡한 묘사나 어려운 비유는 차마 시도할 수 없었다. 단어나 이미지를 골똘히 생각하려고 하면 머리가 핑 돌면서 오한이 들었다. 그간 내가 써온 문장의 수사들이 건강한 몸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단 걸 절절히 깨달았다. 이 아픔은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하루는 지금 내 상태에 딱 들어맞는 표현을 고민하다 침대에 푹 쓰러졌다. '아파, 나 아파'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처지. 어느 땐 그 말조차 버거워 끙끙 신음만 내뱉는 형편에 무슨 비유를 쓸 수 있을까.
멍하니 이부자리에 누워 있을 때면 나를 찾아온 질병에 관해 생각해봤다. 대상포진은 어릴 때 수두를 앓았던 사람에게 나타나는데, 그 바이러스가 몸에 잠복해 있다가 숙주의 면역력이 약해진 틈을 타 발병한다. 나는 내가 어릴 때 앓았던 병의 흔적이 내 몸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는 게 놀라웠다. 찢기고 꿰맨 물리적 자국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몸속 바이러스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니. 우리의 몸은 어떤 기억도 완전히 내어버리지 않고서 언제든 자기의 존재감을 뽐내며 되살려낸다. 좋은 기억이든, 고통스러운 순간이든, 그 시간이 통과한 자취들이 곧 우리의 몸이 되어 그 자체로 함께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숨은 권력자는 내가 몸을 돌보지 않을 때 빨간 정지 신호를 켜며 막아선다.
나는 바이러스가 내게 전하려는 말을 떠올려봤다. 어쩌면 이 바이러스는 나를 살리려고 이토록 나를 아프게 하는지도 몰랐다. 더는 무리하지 말라고, 몸과 마음을 이렇게 몰아붙이면 안 된다고, 자꾸 과속하면 어쩔 수 없이 무지막지한 통증으로 너를 멈춰 세울 수밖에 없다고, 삶의 우선순위를 깨달으라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바이러스가 그렇게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일까. 겉은 차갑지만, 속내는 따듯한 꾸지람처럼. 피부에 돋아난 발진을 살피며 나는 이 붉은 자국이 내 몸의 신호등이라 여긴다.
나와 함께, 내 몸에서 같이 산 또 하나의 동반자. 반갑지 않은 이 방지턱 앞에서 나는 내 삶의 속도를 줄인다. 조심할게. 무엇이 먼저인지 잊지 않을게. 그러니 이제 넌 다시 기나긴 잠에 빠지지 않을래?
[김멜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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