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스 탄생은 그를 '알아본' 누군가 때문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11. 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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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투자 본질은 '꿰뚫는 눈'
투자자 없으면 천재도 없어
실리콘밸리 둘러싼 명과 암
자본주의 그리스신화 읽는 듯
퓰리처상 최종후보에 2차례
750쪽짜리 '벽돌책' 걸작
1984년 애플 컴퓨터 '매킨토시'를 공개하는 스티브 잡스. 잡스는 벤처 투자자들의 자금을 등에 업고 천재 사업가로 도약한다. 매경DB

오래전, 긴 머리의 히피 청년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컴퓨터는 회사 사무실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거대하고 육중한 기계였다. 히피 청년은 그러나 가정에서 사용하는 개인용 컴퓨터가 세상을 지배하리라고 확신했다. 다만 그 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선 그에게 당장 '1만달러'가 필요했다. '돈'을 구하기 위해 청년은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자금을 요청하는 긴 머리 청년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대꾸했다. "네? 집에서 컴퓨터를 사용한다고요?" 1만달러만 투자하면, 또 자기네 회사를 광고해주면 회사 지분의 10%, 아니 20%를 주겠다고 해도 제안을 받은 이들의 답변은 냉랭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의 20%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히피 청년의 이름은 스티브 잡스, 회사 이름은 '애플'이었다. 처음엔 이토록 인정받지 못한 채 '거절'에만 익숙했던 잡스는 결국 벤처 투자자들의 자금을 등에 업고 그야말로 실리콘밸리의 신화적 인물, 아니 인류의 지평을 바꾼 혁신가로 기억된다.

신작 '투자의 진화: 벤처 투자가 만든 파괴와 혁신의 신세계'가 출간됐다. 세상을 바꾸는 진짜 힘은 스타트업 창업자가 아니라 저들을 알아보고 선점했던 벤처 투자였음을 풍부한 사례로 논증한 책이다. 파이낸셜타임스 '2022 올해의 책 최종 후보', 이코노미스트 '2022 최고의 책'에 오른 이 책은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두 차례 오를 만큼 탄탄한 취재력을 가진 저자의 집념이 일궈낸, 750쪽짜리 벽돌책 걸작이다.

투자의 진화 세바스찬 말라비 지음, 안세민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3만5000원

책은 실리콘밸리 첫 번째 벤처 투자 현장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노벨상을 수상한 물리학자 윌리엄 쇼클리의 회사 사무실이다. 쇼클리는 반도체 개발에 한창이었는데, 사실 그의 학자적 명성에 비해 사내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연구원들은 '쇼클리가 물러나지 않으면 회사를 떠나겠다'라는 말까지 내뱉었다. 훗날 '8인의 반란자(혹은 배신자)'로 불리게 될 이들은 반도체 회사 '페어차일드'를 차리는데, 페어차일드에 투자했던 아서 록은 초기 투자금의 600배 수익을 냈다. '실리콘밸리'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 사람들은 깨달았다. 스타트업 투자수익의 본질은 평균치가 가장 많은 '정규 분포'로 이뤄지지 않고, 극소수의 성공이 막대한 이익을 낳는 '멱법칙'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하나의 펀드에서 나오는 최선의 투자수익이 나머지 펀드 '전체'의 수익과 같거나 혹은 능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은 벤처 투자 현장에서 일어났던 여러 전설적인 풍경을 사례로 제시하면서 스타트업이 벤처 투자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또 작은 씨앗에 불과했던 하나의 발명이 어떻게 희소한 자본과 만나 수억 명의 사용자를 잉태하며 수익을 거두는지를 추적한다. 세상을 재편하는 강자들을 둘러싼 비화가 마치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 신화를 읽는 것처럼 흥미롭게 펼쳐진다.

2004년 세쿼이아캐피털 투자팀은 이제 갓 스물한 살인 한 젊은이를 만나기로 했다. 약속했던 회의 시간은 오전 8시. 하버드대 2학년이라던 학생 창업자는 약속 시간이 지나도 등장하지 않았다. 한참 지나 나타난 풋내기 학생을 본 뒤 투자팀은 내심 경악했다. 청년은 잠옷에 티셔츠 차림이었다. 방금 샤워를 했는지 머리까지 젖어 있었다.

투자자들은 늦게 일어난 데다 샤워까지 하고 나온 청년 앞에서 번뇌에 빠졌다. 하지만 "그가 뭘 입고 있든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이건 시험"이란 의견이 중론이었다. 청년이 만든 학내 네트워킹용 웹사이트 이름은 '더 페이스북(The facebook)'이었다. 청년의 이름은 마크 저커버그. 벤처 투자의 본질은 발명가의 외모가 아니라 기업 가치를 꿰뚫는 안목임을 책은 이야기한다.

그보다 몇 년 전인 1998년, 스탠퍼드대 박사 과정생이던 세르게이 브린과 래리 페이지는 인터넷 검색 서비스 개발에 한창이었다. 이미 17개 검색 사이트가 있었지만 두 사람은 자신들의 기술이 다른 기업을 '날려버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두 사람을 알아본 벤처 투자자 존 도어는 최고경영자(CEO) 영입을 추천했다. 도어가 낙점한 인물은 에릭 슈밋이었다.

도어는 슈밋을 직접 찾아가 말했다. "이 회사는 네가 다듬고 키워야 할 작은 보석이야." 하지만 슈밋의 답변은 기대 이하였다. "사람들은 '검색'에 아무 관심도 없어." 사실 슈밋의 답변을 브린과 페이지가 서운해할 필요는 없다고 책은 기록한다. 사실 두 스탠퍼드생이 원했던 자신들의 '구글 CEO'는 슈밋이 아닌 잡스였으니 말이다.

책은 벤처 투자의 명암을 같은 무게로 다룬다. 테라노스 창업자 엘리자베스 홈스 사례에선 껍데기뿐인 회사에 권위를 부여했던 과정들도 추적한다. "벤처 투자를 둘러싼 야망, 질투, 자아에 대한 묘사는 셰익스피어에 가깝다"(NPR), "저자는 우리를 그들의 정제된 세계로 데려가 그들의 자존심과 베팅의 가능성, 그리고 단점을 공히 보여준다"(로이터) 등의 평가가 뒤따른 책이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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