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서 30년 활동 성악가 연광철 "韓가곡 부르며 제 본모습 찾아"
박종호 풍월당 대표 "공급이 없으니 수요가 없는 것…우리나라 정서 담은 클래식"
(서울=연합뉴스) 강애란 기자 = 유럽에서 30년간 활동하며 '최고의 바그너 가수'라고 평가받는 세계적인 성악가인 베이스 연광철(58)이 한국가곡집을 내놨다.
서울 압구정 로데오거리 한복판에 있는 클래식 음반 전문 매장이자 복합 공간인 풍월당이 개관 20주년을 기념해 기획한 앨범이다. 앨범에는 '비목', '청산에 살리라', '그대 있음에' 등 한국 가곡 18곡이 담겼다.
연광철은 3일 풍월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국 가곡을 부르려니 마음이 참 무거웠다"며 "유럽에서 데뷔한 지 30년이 됐는데, 그들의 문화 속에서 살며 그들의 음악을 해석하려고 노력해왔다. 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 있기도 했다"고 고백했다.
이어 "한국 가곡을 부르며 어릴 적 전기도 안 들어오던 시골에 살면서 느꼈던 시골의 정취, 자연의 아름다움이 저절로 떠올랐다"며 "30년간 외국에서 오페라에 외국 사람 역으로 노래를 불렀던 제가 아니라, 한국에서 자란 제 본모습을 찾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 가곡의 단어와 뉘앙스, 전체적인 맥락 등은 제 나름대로 해석해도 관객이나 음반을 듣는 이가 공감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며 "온전히 제 것을 부르는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충주의 외딴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연광철은 1993년 파리 국제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이름을 알렸고, 이듬해부터 2004년까지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 전속 단원으로 활동했다. 독일 바이로이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영국 로열코벤트 가든 등 세계 주요 오페라하우스를 누빈 그는 2018년 독일어권 성악가 최고 영예인 '캄머쟁어'(Kammersaenger·궁정가수) 호칭을 받기도 했다.
앨범에서 가장 눈길 가는 곡은 마지막에 수록된 홍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1926)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리듬을 듣고 흥얼거리게 되는 이 노래를 연광철은 피아노 반주 없이 오직 목소리만으로 녹음했다. 성악적인 기교도 모두 빼고 담담하게 읊조리듯 불렀다.
연광철은 "작곡가가 반주에 대해 지시해놓은 게 없다. 그래서 원래 선율 그대로 불러보기로 했다"며 "이번 앨범에서는 소리와 발성 같은 음악적인 부분에 중점을 두기보다 시를 낭송하는 자세로 임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은 노래를 부르기에 좋은 언어를 가지고 있다"며 "작곡하시는 분들이 음성학적으로 더 많이 공부하면 충분히 예술적인 가곡들이 나올 것 같다. 앞으로 무한한 발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이번 앨범은 풍월당이 2년 전부터 기획한 프로젝트지만, 중간에 엎어질 위기가 있었다. 세계적인 음반 회사와 논의가 진척되던 중 돌연 취소 통보를 받았다. 한국 가곡으로만 구성된 독집의 판매량 등을 고려했을 때 제작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풍월당은 회원 200여명의 기금을 모아 직접 음반 제작에 나섰다.
어느 날 풍월당을 찾아온 미국에 살고 있다는 나이 지긋한 손님은 앨범 제작 이야기를 듣고 1만 달러(약 1천300만원)를 쾌척하기도 했다. 지난달 작고한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도 자기 작품으로 앨범 표지 디자인을 할 수 있도록 후원해줬다. 표지 디자인에 쓰인 작품은 '묘법 No.980308'이다. 그렇게 완성된 앨범은 전 세계에서 판매된다. 한국어와 함께 영어, 일어, 독일어 3개 언어로 번역한 가사집이 함께 제공된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는 1980년대 이후 사멸하다시피 한 한국 가곡을 이어가고, 알려야 한다는 '숙제'가 마음속에 있었다고 했다.
그는 "수요가 없어 공급이 없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공급이 없어 수요가 없는 것이다. 시골에도 피자가게가 들어오면 피자를 먹지만, 가게가 사라지면 더 이상 피자를 먹지 않게 되고, 기억에서도 잊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나라에 뛰어난 연주자들이 나왔지만, 서양음악을 그대로 할 뿐이다. 이걸 한국 클래식이라고 말하는 건 모순"이라며 "우리나라 정서를 아주 잘 담은 것이 한국 가곡이다. 이번 앨범의 18곡은 우리 가슴에 젖어 들고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듣던 곡"이라고 말했다.
이날 박 대표는 풍월당 운영 20주년을 맞은 소회도 털어놨다.
풍월당은 디지털 음원이 나오면서 레코드 가게가 하나둘 없어지던 2003년 문을 열어 클래식 애호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땅값 비싼 압구정에서 건물의 4층과 5층을 사용하다 보니 월세만 2천만원에 달한다. 혹자는 박 대표를 '호사가'라고도 하지만, 박 대표가 이 공간을 유지해 온 것은 공간이 지닌 가치를 믿기 때문이다. 버거운 월세를 내려고 더 열심히 사람들에게 클래식을 알린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감개무량해요. 20년을 문 닫지 않고 버텼다는 게 참 감동스럽죠. 어느 날 매장에 젊은이가 앉아있어 얘기해보니 예전에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왔던 사람이더군요. 지금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음반을 듣다, 아버지 생각에, 이곳에 왔다더라고요. 그때 이 공간이 가진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 됐죠. 이제는 이사도 못 가요. 여기 모든 것에 사람들의 손때가 묻어있잖아요."
ae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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