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안 찍어도 승하차 척척…‘태그리스’ 대신 ‘비접촉’ 어때요?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윤수빈씨는 지난 추석연휴 때 서울 지하철 우이신설선을 타고 성묘를 가다 “태그리스가 뭐냐”는 아들의 물음에 설명하느라 진땀을 뺐다. “어디에서 봤냐”는 물음에 아들은 “역에서 ‘태그리스 게이트’라고 적힌 팻말이 놓인 출입구로 사람들이 교통카드를 대지 않고 그냥 통과하는 것을 보고 무슨 뜻인지 궁금했다”고 답했다. 윤씨는 “태그리스는 교통카드를 찍을 필요 없이 그냥 지나가도 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지만 한편으론 그냥 쉬운 우리말로 고쳐 쓰면 안 되나 싶었다”고 했다.
일상적인 외국어 사용 빈도가 높아짐에 따라 공공기관의 외국어 사용도 늘고 있다. 특히 요즘에는 중점 추진 사업에 정체불명의 외래어가 붙는 경우도 있다 보니 한 번 봐서는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울 때도 있다. 이는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버스와 지하철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추석연휴 기간 며칠에 걸쳐 대중교통 속 외국어·외래어 사용 실태 등을 살펴봤다.
앞서 말한 ‘태그리스’는 근거리 무선 통신장치 등을 사용해 카드나 정보 인식용 칩을 단말기에 접촉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사용자 정보를 인식하는 시스템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도로 통행료나 대중교통 이용 요금 등을 지불할 때 활용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외국어 표현에 대한 일반 국민 인식조사’(2020)에 따르면 ‘태그’(tag·가져다 대기, 갖다 대기)가 무슨 뜻인지 아는 국민은 57%에 지나지 않으며 특히 70대 이상 국민 중에서는 14%만 이 말을 이해한다고 답했다.
‘스마트 쉘터’는 ‘복합 기능 쉼터’로
‘태그’와 ‘리스’(less, ~없는)의 합성어인 태그리스는 더욱 어려운 말이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은 태그리스를 대체할 쉬운 우리말로 ‘비접촉, 비접촉식’을 선정한 바 있다. 2020년 문체부와 국립국어원이 함께 진행한 ‘어려운 외국어에 대한 우리말 대체어 국민 수용도 조사’ 결과 응답자의 68.2%가 ‘태그리스를 쉬운 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좋다’고 답했고 태그리스를 ‘비접촉, 비접촉식’으로 바꾸는 데 응답자의 96.3%가 적절하다고 답했다.
지하철 환승 통로가 긴 역에 설치된 ‘무빙워크’도 마찬가지다. 무빙워크(moving walk)는 한국에서만 주로 쓰이는 단어로 ‘사람이나 화물이 자동으로 이동되도록 만든 경사진 길 모양의 장치’로 영어로는 ‘무빙 사이드워크’(moving sidewalk)라고 한다. 국립국어원은 무빙워크를 ‘자동길’로 순화해서 부를 것을 권장하고 있다.
김형주 교수(상명대 국어문화원)는 “‘무빙워크’의 순화어 ‘자동길’은 만들어진 지 20년이 넘었지만 잘 찾아볼 수 없다”며 “순화어가 어색하기 때문일 수 있지만 순화어를 널리 알리고 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순화어는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이번엔 서울 지하철 2호선 합정역 인근 버스정류장으로 자리를 옮기니 독특한 디자인 공간에 ‘스마트 쉘터’(외래어 표기법으로는 스마트 셸터라고 씀)라는 낯선 용어가 눈에 띈다. 스마트 셸터는 정보통신기술과 신재생에너지, 공기청정기술 등을 적용한 신개념 버스정류장으로 냉난방기, 공공 무선 인터넷, 휴대전화 충전 기능 등을 갖췄다. 서울시는 이러한 스마트 셸터를 합정역 인근 버스정류장을 포함해 10여 곳에 운영 중이지만 외국어 이름을 사용하는 바람에 그 의미를 모르고 지나치는 시민이 많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스마트 셸터는 ‘복합 기능 쉼터’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다.
고운 우리말 살려 정착된 사례도
어려운 외국어를 쉬운 말로 풀어 써 정착된 사례도 있다. 잠시 차를 세워 사람을 내려주거나 태우는 공간을 일컫는 ‘환승정차구역’은 원래 ‘키스 앤드 라이드’(K&R·Kiss and Ride)로 많이 쓰였다. 헤어질 때 뽀뽀를 하며 인사하는 영어권 문화에서 비롯된 말인데 한글문화연대가 우리말로 순화하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2018년 국립국어원이 전국 곳곳의 ‘키스 앤드 라이드’를 환승정차구역으로 개선했다. 환승정차구역의 개념이 더 명확하고 일반 시민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만큼 우리말로 빠르게 정착할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속도로 노변’이나 ‘노견’을 순우리말인 ‘갓길’로 바꾼 것 역시 고운 우리말을 살린 좋은 예이다. 이밖에 완전히 정착되지는 않았지만 ‘스크린도어’를 ‘안전문’으로, ‘AED’를 ‘자동제세동기’를 거쳐 ‘자동심장충격기’로 바꾸려는 노력은 외국어·외래어를 쉬운 우리말로 쓰려는 움직임이다.
아무리 좋은 대중교통 시설과 서비스를 갖췄더라도 언어 문제로 이용에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면 무슨 소용일까? 특히 교통 분야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안전·위험·건강과 관련된 말로 모든 국민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외국어·외래어의 사용을 지양하고 쉬운 우리말을 써야 한다. 더 많은 사람이 대중교통을 편리하게 누릴 수 있도록, 모두를 위한 대중교통이 될 수 있도록 더 알기 쉽고 친숙한 우리말을 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글·사진 나윤정 객원기자
감수: 김형주 상명대 국어문화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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