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밍·SNS·영어 가사…“K-팝이 주류 시장 패권 잡았다” [인터뷰]
K-팝이 주류 음악 시장 패권 장악한 이유
스트리밍 시대ㆍ틱톡 등 SNSㆍ공용어 사용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방탄소년단 정국 3671만 명, 방탄소년단 3061만 명, 뉴진스 2402만 명, 블랙핑크 2059만 명, 블랙핑크 제니 1807만 명, 투모로우바이투게더 1143만명. 세계 최대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에서의 월간 청취자 숫자다. 3일 첫 솔로 앨범을 낸 방탄소년단 정국은 지난 한 달간 K-팝 아티스트 중 가장 많은 청취자를 기록했다.
음악 빅데이터 분석 업체인 차트메트릭(Chartmetric)에 따르면 지난 몇 년 사이 전 세계 음악 시장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는 장르는 단연 K-팝과 라틴팝이다.
유니버설 뮤직 그룹에서 부사장을 지낸 채즈 젠킨스 차트메트릭 최고사업책임자(CCO)는 “과거엔 전통적인 음악 산업의 선두주자였던 미국과 영국에서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는 가수가 나왔는데, 메인 스트림에서 더이상 글로벌 스타일의 가수를 양산해내지 못하고 있다”며 “이제는 한국과 라틴아메리카에 패권을 뺏기고 있다”고 말했다.
스포티파이에서의 월간 청취자 숫자는 이러한 흐름을 증명하는 지표다. 차트메트릭의 조성문 대표는 “아티스트의 인기도를 측정하고 예측하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데이터 분석이 필수인데, 그 중 스포티파이 월간 청취자 숫자는 이 아티스트의 현재 인기도와 성장 속도를 보여주는 가장 중요하고 변치않는 지표”라고 설명했다.
차트메트릭은 전 세계에서 900만 명에 달하는 가수들의 글로벌 음원 스트리밍, 플레이리스트, 소셜미디어, 위키피디아 등의 데이터를 집계, 분석한다. 하이브, SM, JYP, YG 등 국내 4대 기획사는 물론 소니, 유니버설뮤직과 같은 글로벌 음반사, 넷플릭스 등 전 세계 굴지의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차트메트릭의 고객이다.
차트메트릭의 조성문 대표와 채즈 젠킨스 CCO는 최근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를 통해 “스포티파이의 등장으로 인한 전 세계의 스트리밍 시대 돌입, 틱톡을 비롯한 SNS의 인기, 영어 가사를 비롯한 높은 수준의 음악은 K-팝이 지난 몇 년 사이 세계 음악 시장에서 부각된 이유”라고 강조했다.
■ ‘스트리밍 시대’로 돌입·틱톡의 유행…K-팝 확산 분기점
전 세계 음악 산업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됐던 때는 2015년 즈음이다. 차트메트릭에 따르면 이 시기는 음악 산업에서 ‘음원 다운로드’가 사라지고 ‘스트리밍’으로 넘어간 때였다.
조성문 대표는 “지금도 LP와 CD를 소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세계 최대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 스포티파이가 등장하며 미국 시장을 변화시켰고 그것이 전 세계 음악 산업의 혁신이 시작됐다”고 봤다.
K-팝 업계에 있어서도 2015년은 ‘분기점’과 같은 해다. 그 해 4월 방탄소년단(BTS)은 ‘화양연화 파트1’ 앨범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파트1, 2로 나눠 선보인 앨범 시리즈인 ‘화양연화’에선 ‘아이 니드 유’(I NEED U)와 같은 히트곡이 나왔다. 이 때는 세계 무대에서 방탄소년단이 ‘유망주’에서 ‘정상급 스타’로 발돋움한 시점이다. 방탄소년단은 2015년 11월 발매한 ‘화양연화 파트2’로 미국 빌보드 메인 앨범 차트인 ‘빌보드 200’에 입성했다.
조 대표는 당시를 돌아보며 “대대로 미국과 영국에서 만들어진 팝 음악이 아닌 노래가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경우가 없었는데, K-팝은 독특한 지점에 있었다”며 “2015년 초 방탄소년단의 팬덤은 해외에도 있었지만, 당시 미국에서 반응이 나오며 재밌는 지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스포티파이를 통한 스트리밍 시대로의 돌입은 전 세계 청취자들이 국가와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만나는 계기가 됐다. 여기에 트위터,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 채널, 틱톡·유튜브 등의 동영상 플랫폼이 음악 확산과 전파의 ‘전령’ 역할을 했다.
차트메트릭에 따르면 ‘스트리밍 시대’가 되면서 스포티파이 데이터에선 “미국 테네시 주에 살고 있는 24세 여성이 아이폰으로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의 노래를 1분 30초간 들었는데, 그것을 발견한 경로”까지 분석할 수 있게 됐다. 그 결과 스포티파이의 ‘플레이리스트’, 틱톡의 쇼트폼 속 배경음악(BGM)이 히트곡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스포티파이에선 AI(인공지능)가 짧은 기간 동안 눈에 띄게 스트리밍이 많이 된 노래를 자동으로 ‘주요 플레이리스트’(선곡 및 추천 채널)에 넣는다. 이 플레이리스트는 정해진 음악 분류 알고리즘에 맞춰 자동으로 곡을 선정, 팔로어에게 들려준다. 스포티파이엔 무수히 많은 플레이리스트가 존재, 그 중 ‘민트(mint)’라는 플레이리스트의 팔로어는 무려 600만 명이 넘는다. 이 플레이리스트에 신곡이 오르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600만 명이 넘는 사용자에게 음악이 노출되는 것이다. 방탄소년단이 스포티파이 차트에서 중요한 성적을 거둬 미국 빌보드 차트까지 장악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조 대표는 “스트리밍 플랫폼이 음악 소비의 중요한 창구가 되면서 사람들은 굳이 음악을 찾아 듣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살게 됐다”며 “스포티파이의 무수히 많은 플레이리스트에 인기있는 노래가 올라가면 사용자들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노래를 자연스럽게 만나는 계기가 된다”고 말했다.
스포티파이의 플레이리스트와 틱톡의 영상에 삽입된 배경음악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전 세계 차트를 장악했다. 전속계약 분쟁으로 업계를 달궜으나, 올초 빌보드 신화를 쓴 피프티 피프티의 ‘큐피드’는 틱톡에서 바이럴이 돼 스포티파이에서 인기를 끌며 재생수가 늘었고, 이로 인해 미국 빌보드, 영국 오피셜 차트까지 흔든 곡이다. 스포티파이에서의 재생 횟수는 미국 빌보드 ‘핫100’ 차트 집계에 활용된다.
조 대표는 “음악 청취자들이 새로운 가수와 음악을 발굴할 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플랫폼은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틱톡”이라고 강조했다.
■ 블랙핑크 이후 영어 가사 늘어…K-팝 확산에 영향
음악 소비 환경의 변화, 새로운 SNS의 등장과 더불어 음악의 변화와 진화는 K-팝이 세계 음악 시장의 중심에 안착한 배경이다. 전 세계 작곡가들이 K-팝 창작에 참여하며 자연스럽게 영어 가사 비중이 늘었고, 이는 ‘언어의 장벽’도 자연스럽게 넘는 계기가 됐다.
채즈 젠킨스 CCO는 “하나의 음악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거나 특정 지역에 국한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는 결국 음악의 장르”라고 했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스포티파이에서 월간 청취자 숫자가 장장 1억 명에 달하는 ‘거물 스타’로, 컨트리 장르를 기반한 팝 음악으로 미국과 세계 시장을 완전히 장악했다. 젠킨스 CCO는 “컨트리 음악 장르만 할 경우 특정 나라에서만 국한해 인기를 얻을 수 밖에 없고, 팝 음악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다”며 “이런 배경에서 언어는 음악 확산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영미 문화권 사람들은 아직도 다른 나라의 언어로 음악을 듣는 것에 친숙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다인종 국가인 미국에선 음악 소비에 있어 가장 보수적인 미디어인 라디오가 여전히 중요한 매체로 작용한다. 미국 빌보드 차트 집계에서도 라디오는 중요한 지표다.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라디오에선 비영어권 음악에 대한 선곡엔 보수적이다. 2010년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K-팝에 영어 가사가 많아진 것 역시 주류 음악 시장 공략의 일환이었다.
써클차트에 따르면 올 상반기 디지털 차트 톱 400에 오른 걸그룹 노래 가사에서 영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8년 동기 대비 18.9% 증가한 41.3%, 보이그룹의 경우 5.6% 증가한 24.3%를 기록했다. 걸그룹의 영어 가사 비중이 높은 것은 이들은 보이그룹보다 더 대중성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룹 별로는 (여자)아이들의 영어 가사 비중이 53.6%, 르세라핌 50.6%, 블랙핑크 50%, 엔믹스 49.3%, 뉴진스 48.4% 등이었다.
김진우 써클차트 수석연구위원은 “블랙핑크의 글로벌 성공 이후 내수 중심의 걸그룹 시장이 해외로 확대되며 영어 사용 비중이 늘어났다”며 “그룹별로 봐도 해외 소비층이 많을수록 영어 사용 비중이 높다”고 말했다.
방탄소년단이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은 이후의 중요한 전략 역시 ‘영어 노래’를 내는 것이었다. 2020년 첫 영어 싱글 ‘다이너마이트’를 시작으로 영어 가사로 된 음악을 내자 이들은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100’ 1위의 단골손님이 됐다. 정국의 첫 솔로 앨범 ‘골든’(GOLDEN)에 수록된 11곡은 전곡이 영어 가사다. 정국은 “해외 음악 시장을 목표로 준비한 앨범인 만큼 모두 영어 곡을 선택했다”고 했다.
언어는 팬덤을 넘어 대중적인 음악 소비자가 K-팝에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요인이 됐다. 틱톡에서 인도네시아 사용자가 ‘스페드 업(Sped up, 원곡을 130~150% 가량 배속해 만든 2차 창작물)’ 버전으로 올린 ‘큐피드’의 영어 곡은 청취자 다수가 K-팝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소비했다. 이 곡은 스웨덴 출신 작곡가들이 썼다.
스트리밍, SNS, 언어 등 모든 요인이 맞아 떨어졌으나 K-팝의 패권 장악의 배경엔 중요한 요소가 숨어있다. 높은 수준의 ‘음악의 질’이다.
젠킨스 CCO는 “과거 음악 산업에선 노래를 다른 언어로 바꾸는 것만으로 음악이 더 많이 확산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이제는 언어 이상의 것을 신경써야 한다”며 “가장 중요한 것은 전 세계 사람들이 존중하고 참여할 마음이 생기는 음악의 퀄리티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K-팝은 음악은 물론 음악에서 파생돼 나온 뮤직비디오, 포토카드, 스타일링, 퍼포먼스 등이 국제 무대가 요구하는 수준을 굉장히 높은 퀄리티를 보여준다”며 “더 좋은 음악, 좋은 아티스트는 언어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진다”고 강조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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