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랫말에 새겨진 전쟁의 상처[살며 생각하며]
6·25 아픔 담긴 대중가요
지금도 처절한 심금 울려
北의 허울 좋은 명분 속아
대비 않으면 또 전쟁 불러
참다운 평화는 말이 아닌
강력한 힘의 우위로 가능
바야흐로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다. 주변을 보면 산과 나무들이 앞다퉈 울긋불긋 색동옷으로 갈아입고 그 고운 자태를 뽐낸다. 이렇게 청명하고 아름다운 가을의 정취를 향기처럼 품고 있는 천고마비라는 말 속에는, 다른 한편으로 북쪽 오랑캐를 경계하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한서(漢書)’의 흉노전에 보면, 중국 북방에서 일어난 유목민족 흉노족은 해마다 가을철에 고장의 농경지대를 약탈하려고 침입했으므로, 천고마비(또는 秋高馬肥·추고마비)라는 말은 곧 외적을 대비하라는 경계의 말이기도 하다.
우리 대중가요 중에도 적의 공격에 대비하지 못해 일어난 전쟁의 참화를 담은 노래가 뜻밖으로 많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 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라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1959년 가수 황정자가 불러 크게 히트한 ‘처녀 뱃사공’은 ‘부길부길 쑈’로 유명했던 윤부길(가수 윤항기·복희의 아버지)이, 아버지는 없고 오빠는 군 복무 중이라 집안에 남자가 없어 처녀가 뱃사공을 한다는 딱한 실화를 듣고 지은 노랫말이다.
6·25전쟁은 1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희생자를 낸 동족 간의 비극으로, 특히 남편과 아들과 오빠를 잃은 수많은 여성 가장을 양산했다. 어머니와 딸 단둘이서 힘든 농사와 가업을 이어가야 하는 전쟁미망인(未亡人) 여성들과 전쟁고아가 휴전 이후 큰 사회 이슈로 떠오르다 보니, 대중가요에도 1969년까지 최정자의 ‘처녀 농군’과 이미자의 ‘춘천댁 사공’ 등 여성 가장 노래가 계속 발표되었다. 1954년에 발표된 박단마의 ‘슈샤인보이’는 휴전 이후에도 전쟁으로 고아가 된 아픔을 담은 노래로 세간에 크게 유행했다.
‘슈샤인 슈샤인 보이 슈샤인 슈샤인 보이/슈슈슈슈 슈샤인 보이 슈슈슈슈 슈샤인 보이/헬로 슈사인 헬로 슈사인 구두를 닦으세요/구두를 닦으세요 구두를 닦으세요/ 아무리 피난 통에 허둥거려도/ 구두 하나 못 닦아 신는 도련님은요/ 어여쁜 아가씨는 멋쟁이 아가씨는 노노 노굿이래요’
이 밖에도 6·25전쟁으로 인한 이산의 아픔을 담은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1953년),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는 아내의 결의를 그린 심연옥의 ‘아내의 노래’(1952년), 전쟁 중 장병들의 전우애를 담은 현인의 ‘전우야 잘 자라’(1950년), 생사의 전장에서 모정을 그리는 신세영의 ‘전선야곡’(1952년) 등이 발표되었다.
휴전 후에는 영양실조로 딸을 잃은 가수 겸 작사가 반야월의 눈물 참회록이랄 수 있는 ‘단장의 미아리고개’(1956년)와, 국방을 소홀히 하다 나라를 잃을 뻔한 교훈을 담은 최갑석의 ‘삼팔선의 봄’(1959년) 등이 줄지어 발표되어 전쟁 세대의 가슴을 울렸다. 이후에도 친동생을 6·25전쟁으로 잃은 작곡가 전오승의 눈물의 진혼곡이랄 수 있는 허성희의 ‘전우가 남긴 한마디’(1978년), 전쟁으로 인한 1000만 이산가족의 아픔을 담은 설운도의 ‘잃어버린 삼십 년’(1983년) 등 6·25전쟁을 소재로 한 가요들이 줄지어 나와 애창되었다.
전쟁은 무엇일까? 전쟁은 인류가 인류에게 가하는 가장 잔인한 폭압이다. 전쟁은 개인끼리의 투쟁인 ‘싸움’과는 다르다. 전쟁은 집단적이며 선동적이며 허구적이며 위선적이다. 전쟁을 일으키는 주동자는 대개 독재자들로서, 구국·해방·정의와 보민(保民), 신(神)의 뜻 같은 대의와 명분을 앞세운다. 6·25전쟁 역시 침략자들은 미(美) 제국주의로부터 남조선을 해방한다는 허울 좋은 명분을 달았다. 그러나 권력자들이 자기가 쥐고 있는 권력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 선택하는 것이 놀랍게도 전쟁이라는 수단이었음은 역사는 잘 말해 준다.
전쟁은 영토와 주권과 조국과 생명과 재산만 앗아가는 게 아니다. 도덕과 이성과 희망과 인간성까지도 파괴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러 가지 트라우마와 외상후 스트레스장애(PTSD) 등으로 일생의 고통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전쟁은, 어린이와 여성과 노약자들에게 더 잔인하다. 따라서 전쟁을 예방하기 위한 강력한 억지력은 백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무리 그럴듯한 평화회담도 영원한 평화를 담보해 주지 않는다. 전국시대 합종과 연횡을 믿었다가 진나라에 망한 6국이 그랬고, 나치 독일을 믿었다가 기습 공격에 수도까지 함락당할 뻔했던 소련의 대조국전쟁(獨蘇戰爭·독소전쟁)이 그랬으며, 우리의 6·25전쟁이 그러했다. 이런 사례는 이루 다 손꼽을 수 없다. 평화를 담보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말이 아니라 강력한 군사적 우위로 억지력을 증강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라엘-하마스의 충돌로 수많은 양민이 목숨을 잃는 현장을 우리는 보고 있다. 이런 반인륜적인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지금 북한은 세계의 경제 봉쇄로 1996년부터 겪었던 ‘고난의 행군’ 때보다 더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이런 때 북한 권력자들이 인민들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려고 하는 시도는 삼척동자도 예견하는 일로, 그 수단이 결코 ‘전쟁’이 돼서는 안 된다.
천고마비의 계절을 맞아 우리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할 일이 무엇인지 점검하고, 부족한 병기와 전술을 새로이 갖춰 다시는 6·25의 참상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한다. 참다운 평화는 말이 아니라 힘의 우위에서 온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배움을 얻는다면, 우리 가요에 다시는 전쟁을 소재로 하는 가슴 아픈 노래들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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