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여행]<38> 디자인을 바꾸면 치매 증상이 달라진다
70대 초반에 행동이나 말에 이상을 느낀 A씨가 병원을 찾았을 때에는 이미 치매 중기로 진단이 됐다. A씨와 그의 아내는 치매안심센터의 가족모임에 참석하는 등 나름대로 대응을 해 왔지만 최근에는 집에서 생활하는 것에 자신을 잃게 됐다.
A씨의 시간인지가 고장나 한밤중에 깨어나 돌아다니면서 A씨의 아내마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게 됐다. 어느 날 A씨가 냉장고에 소변을 보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시설로 옮기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게 됐다. 치매인의 시공간 혼란은 환경을 바꿈으로써 어느 정도 대응이 가능하다고 한다.
일본 후쿠오카시에 있는 소규모다기능거택요양시설 '코우후관(香風館)'을 찾아갔다. 이 곳은 20여 명의 소수 노인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형태의 장기요양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이다. 일주일에 2번은 자기 집에서 방문 요양서비스를 받고 다른 요일들은 낮 동안 이곳에 와서 돌봄서비스를 받는다. 가족이 휴가를 가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은 경우에는 이 곳에서 숙박도 가능하다.
이렇게 '3가지 서비스'가 하나의 세트로 제공되는 시설은 일본에 매우 흔한 형태여서 필자가 '코우후칸'을 찾아간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다. '집에서 기저귀를 하던 노인이 이 곳에 와서 자기 발로 화장실을 간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이 곳은 2년 전에 신축하면서 후쿠오카시가 추진하고 있는 '인지증프렌드리디자인'을 도입했다. 인지증프렌드리디자인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실내에서 생활하기에 적합하도록 단차를 없애고 핸드레일을 설치한 '배리어프리'건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간과 공간인식력이 떨어지는 치매인들의 인지기능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디자인을 말한다.
화장실이나 부엌 등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픽토그램과 사인을 활용하거나, 벽과 바닥에 대조색을 사용해서 낙상위험을 줄이는 등 치매인들의 자립생활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궁리를 한 디자인이다.
코우후칸을 들어서면 바로 넓직한 거실이 나온다. 천장이 높고 하늘이 보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환하고 넓은 느낌을 준다. 치매인들은 좁은 공간에 있으면 불안해하는 특성이 있어서 개방적인 느낌을 주도록 설계를 했다. 공간도 넓고 가구들이 많지 않아 이용자들은 워커나 휠체어를 타고 실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다른 시설의 노인들이 붙박이가구처럼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거실을 둘러싸고 개인실이 있다. 가족이 여행을 가거나 건강이 나빠져 특별히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숙박이용자들을 위해 6개의 개인실이 마련돼 있다. 예약제로 이용하지만 긴급하게 숙박이 필요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방 하나는 항상 비워둔다고 한다.
마침 숙박을 하는 치매노인이 침대에 누운 채 방문을 열어뒀다.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해서란다. 개인 공간을 원하지만 한편으로는 고립을 원치 않는 이용자들을 위해 바깥 기척이 느껴지는 장지문, 커텐 등을 활용했다.
화장실과 욕실은 다른 방들과 구분되도록 커다란 사인이 표시된 녹색문이다. 화장실의 하얀색 변기가 쉽게 인지되도록 벽을 짙은 색으로 칠했다. 인지증환자의 경우 화장실에서 바지를 내리는 동작을 잊어버려 그대로 용변을 보는 경우가 있는데, 화장실에 대한 몸의 기억을 자극하도록 여러 가지 궁리를 한 것이다.
바닥과 벽지의 색깔을 달리하고 바닥 자재는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소재를 썼으며 복잡한 문양은 피했다. 낙상의 주요 원인이 다리근력이 약한 것도 있지만 혼란스러운 바닥 문양에 발을 헛디뎌서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거울을 없애고 욕조 옆에 간이의자를 준비했다. 거꾸로 사무실이나 창고는 이용자들이 들어오지 않도록 문을 벽과 구분되지 않는 색상을 사용하거나 커튼을 달아뒀다.
코우후칸의 케어매니저인 모리타 카즈히로씨는 "노인들이 살고 있는 집은 건강한 상태에 맞춰 설계된 집이기 때문에 집에서 더 헤매게 된다. 밤낮을 구분하지 못하고 화장실을 찾지 못해 기저귀를 차게 된다. 하지만 치매노인의 특성에 맞춰 설계된 시설에서는 혼란이 줄어들고 불안 초조한 행동도 사라진다. 그래서 이 곳에 와서 '치매가 나았다'는 오해까지 생길 정도"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주택 안에서 활동성이 높아지기도 하고 기능이 억제되기도 한다. 과거 일본의 협소한 주거 공간, 주택의 높은 계단과 문턱으로 노인들의 기능이 더 빨리 퇴화했고 결국 네타키리(와상노인)를 양산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이다. 최근 인지증프렌드리디자인을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는 곳이 바로 후쿠오카시이다.
후쿠오카시에서는 인지증프렌드리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만들기 위해 먼저, 공공시설에서 사용하는 사인과 픽토그램을 인지증인 사람들은 어떻게 인지하는지를 조사해 보았다.
예를 들어, 엘리베이터를 표시하는 사인을 보고 일반인들의 97%는 이것이 엘리베이터임을 알지만 치매인들의 46%만이 이것을 알아챈다. '사람이 서 있다' 라고 대답하는 응답이 많았다. 출입구를 나타내는 사인을 보고 치매인들은 '사람이 달리고 있다' '마라톤을 한다'식으로 이해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SOS표시에 대해서도 치매인의 28.1%만이 구조요청의 의미를 이해했다. 공공시설에서 화장실 표시 역시 휠체어를 탄 사람들의 눈높이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조사를 토대로 인지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디자인이 만들어졌다. 실증을 통해 만들어진 디자인은 후쿠오카시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에 소개돼 새로 만들어지는 시설들은 이러한 가이드라인을 따르고 있다.
한국에서도 치매를 가진 사람에게 적합한 주거환경, 공공시설 디자인을 개발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서울시 디자인정책과는 지난해 노인복지시설에서의 정신건강 친화디자인을 개발, 소개하기도 했다. 올해 발표된 장기요양 3차기본계획에서는 '집에서 나이들기(Aging in Place)'를 위해 주거 개조를 정책과제로 제시해서 향후 치매, 중증장애인이 살고 있는 주택의 개조사업이 활발할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그동안 주택개조 필요성이 대두됐음에도 확산되지 못한 이유는 아무래도 비용 문제다. 한국의 경우 중증장애인 등 주거약자계층에게 주택개조비용이 지원되지만 일반인을 위한 주택개조자금지원제도는 아직 없다.
일본의 경우 간병이 필요하거나 예방적 차원에서 주택을 배리어프리로 개조할 때 개조비용지원, 재산세·소득세 감면, 저리융자 등의 지원이 있다. 이는 자가소유주뿐 아니라 임대인, 임차인 모두에게 해당된다. 또 배리어프리 주택 건설 또는 구입에 대해 대출금리 우대, 거주기간 동안에 융자를 다 갚지 못하더라도 사망 시에 갚도록 하는 배리어프리 주택개조비용 융자 제도가 있다.
이러한 경제적 지원말고도 국내에서 배리어프리 및 치매친화적인 주거를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 시공업체, 주택개조 방법 및 자재에 대한 정보가 제공될 필요가 있다.
고령자일수록 주택 사정은 더 열악하다. 많은 고령자들이 단독 주택에 거주하는데 30년 이상 노후 주택에 사는 비율이 36%를 넘는다고 한다. 이러한 노후주택들은 냉난방비, 보일러동파 등 주택유지보수에 더 큰 어려움을 안고 있다. 혼자서 걷는 보행 능력이 사라진 뒤, 엘리베이터가 없는 연립주택에서 몇 년째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 본 적이 없는 노인들이 적지 않다.
그들에게 집은 감옥이나 다름 없다. 노후주택은 노인들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건강악화, 사고 등으로 시설 입소를 부추기는 요인이 된다. 이러한 문제들에 적극 대응하는 주거정책이 이뤄질 때 치매, 장애를 가진 고령자들도 더 오래 지역에서 생활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김동선 조인케어 대표/숙명여대 실버비즈니스학과 초빙대우교수는 30대에 초고령국가 일본에서 처음 노인문제를 접한 뒤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 두고 노인문제전문가로 나섰다. '야마토마치에서 만난 노인들' '마흔이 되기 전에 준비해야 할 노후대책7' '치매와 함께 떠나는 여행(번역)' '노후파산시대, 장수의 공포가 온다(공저)' 등을 썼으며 연령주의, 치매케어등을 연구하고 있다. 치매에 걸려서도 자기다움을 잃지 않으며 좋은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요양 현장을 만들기 위해 '사람중심케어실천네트워크'를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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