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 가르치고 ‘그림자 보필’… 출세 쉽지만 심기 건드려 목숨 잃기도[박영규의 조선 궁궐 사람들]
학자들 1일 3회 경서·교양 강의
무신들은 수업 중에도 철저 경호
연산군 수업 태도 꾸짖은 조지서
엄하게 가르치다 결국 보복 당해
암살 공포 정조 보호해준 홍국영
인사권 꿰차고 세도정치 일삼아
정조, 정적 시선 洪에 돌려 놓고
규장각 확대 등 왕권 기틀 다져
1.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기능
궁궐 안에는 세자궁을 위한 두 개의 관청이 있었는데, 그것은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다. 세자시강원은 세자를 모시고 경서와 역사를 강론하며, 나라의 군주로서 갖춰야 할 인격과 교양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은 곳이다.
세자에게 하는 강의를 서연(書筵)이라 했는데 이는 임금께 하는 강의인 경연(經筵)과 비슷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연은 오전, 오후, 저녁 하루에 세 번 열렸으며 주로 ‘논어’ ‘맹자’ 같은 유교 경전과 ‘춘추좌전’ 같은 역사책을 배웠다.
세자는 왕이 될 사람이라 세자교육에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 스승으로 동원되었다. 영의정이 세자의 최고 스승이 되고, 좌의정이나 우의정 중 한 사람이 또한 스승을 맡는 등 정승판서들까지 스승으로 나서게 된다. 이들이 스승이 됨으로써 세자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식견과 국가관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정승판서들은 정사에 바쁜 사람들이었기에 세자교육을 주로 맡아 하던 사람은 종3품의 보덕 1명을 비롯하여 필선, 문학, 사서, 설서 등 총 5명의 문관들이었다.
이렇듯 세자시강원이 세자의 학문을 담당하는 곳이라면 세자익위사는 세자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은 곳으로 세자 경호군대라고 할 수 있다. 장차 나라의 임금이 될 세자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관리는 모두 무술에 능한 무신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늘 세자 주변에서 보필하는 이들이기에 무신 중에서도 특히 교양이 풍부한 사람으로 가려 뽑았다. 이들은 세자가 행차할 때는 앞에서 인도하고, 수업을 받을 때에는 섬돌 아래에서 호위하면서 그림자같이 세자를 보필했다.
세자익위사엔 정5품 좌익위, 우익위 각 한 명씩을 우두머리로 하여 좌사어, 우사어 등 총 14명이 근무하였다.
2. 연산군에 밉보여 목숨을 잃은 조지서
세자의 학문을 담당하던 세자시강원의 문관들은 대개 세자가 왕이 된 뒤에 중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까닭에 세자시강원도 출세의 디딤돌이 될 수 있는 직장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세자시강원 출신이라 해서 반드시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론 그들 중에 세자에게 밉보여 되레 출셋길이 막히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양녕대군이나 연산군처럼 공부를 싫어하는 세자를 가르치는 경우엔 남달리 처세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혹여 수업 중에 세자의 자존심을 건드리거나 심기를 상하게 했을 경우 훗날 보복을 당할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폭군 연산군은 세자 시절 자신을 가르치던 스승을 죽였다. 연산군이 세자로 있을 때, 그를 가르치던 문관 중에 허침과 조지서란 인물이 있었다. 이들은 학문과 명망이 높아 성종이 친히 세자를 맡아달라고 부탁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공부를 싫어하는 연산군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랐고, 그 태도로 인해 완전히 다른 운명이 되었다.
조지서는 평소에 엄하고 깐깐한 성품으로 연산군이 수업을 비우거나 과제를 소홀히 하는 것을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연산군이 수업을 비우거나 수업 태도가 나쁘면 상감에게 고해바치겠다고 으름장을 놓곤 했다. 이에 비해 허침은 성격이 유하여 늘 웃으면서 연산군을 대하며 부드러운 말투로 타이르곤 했다. 이런 까닭에 어린 연산군은 조지서를 싫어하고 허침을 좋아했다. 그래서 하루는 벽에다 연산군은 이렇게 써놓았다.
‘조지서는 대소인배요, 허침은 대성인이다.’
그런데 이때만 해도 조지서는 이 글의 의미가 자신에게 어떤 운명을 가져다줄지 전혀 몰랐다. 그저 어린 마음에 속상해서 쓴 단순한 낙서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연산군은 자신을 질책하거나 위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 용납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거기다 집요하고 잔인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스승에 대한 불만과 증오심을 확대하여 결국 왕이 된 뒤에 조지서를 죽여 버렸던 것이다.
3. 정조의 방패막이가 된 세도가 홍국영
하지만 세자시강원 문관들 중에 조지서와 같이 불행한 죽음을 맞이한 인물은 그다지 많지 않다. 대개는 세자를 가르친 인연 덕분에 관직 생활이 무난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세자시강원이 권력의 발판이 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런데 정조대의 기린아 홍국영은 세자시강원에서 근무한 덕분에 20대의 젊은 나이에 엄청난 권력자가 되어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도대체 홍국영은 어떻게 젊은 나이에 그토록 엄청난 권력을 가지게 되었을까? 여기엔 그를 엄청난 권력자로 만든 정조의 치밀한 계획이 숨어 있었다.
홍국영은 24세 때인 177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했고, 이후 세자시강원 관원이 되어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를 보필했다. 정조는 세손 시절에 노론과 대립한 까닭에 암살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홍국영은 세자익위사의 관원들을 지휘하며 세손을 지켜냈다. 그리고 마침내 1776년에 무사히 정조를 왕위에 앉히는 데 성공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을 일약 정3품 동부승지로 전격 발탁하고 이내 도승지로 승진시켰으며, 근위부대인 숙위소를 설치하여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하도록 했다. 이때 홍국영의 나이는 불과 29세밖에 되지 않았다.
이처럼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팔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을 한 손에 쥐게 되었다. 모든 관리는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으므로 이른바 ‘세도(勢道)’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국영의 세도 정치는 4년밖에 가지 못했다.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조는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집권 4년 만인 1780년에 가산을 몰수당하고 전리로 방출되고 말았다.
사실, 정조는 홍국영의 4년 세도 정치 기간 충실히 규장각을 확대하고 인재를 끌어모았다. 즉, 모든 신하의 눈을 홍국영에게 집중시킨 다음, 자신은 앞으로 펼칠 자신의 정치를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고의로 홍국영의 세도 정치를 부추기거나 방치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말하자면 홍국영을 자신의 왕권 확립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다 용도가 끝났다고 판단되자, 가차 없이 토사구팽해 버린 것이다.
작가
■ 용어설명 - 세도 정치(勢道政治)
조선 후기에 한 명 혹은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형태. 조선 후기에 신료의 발언권이 강해짐에 따라 유학자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산림이 세도의 당사자로 지목되곤 했다. 권세가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비판하던 황현, 안확 등의 논자들이 ‘세상 가운데의 도리’를 뜻하는 세도(世道)를 세도(勢道)로 바꾸어 표현함에 따라 세도 정치의 용어가 성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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