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호크니를 미디어 아트로 만나다…50분간의 몰입 체험
험난한 각자도생의 시대에 그림이야말로 기쁘고 즐거운 존재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준 대가가 있다. 삭막한 듯하면서도 천진스러운 느낌의 선과 형, 마음을 동하게 하는 매혹적인 원색조의 화면으로 우리의 일상과 자연, 사람들의 천태만상을 표현해온 시지각예술의 달인. 붓질과 디지털 카메라, 아이패드를 자유자재로 골라서 구사하는 생존 화가 최고의 거장.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나 미국 엘에이를 중심으로 활동해온 데이비드 호크니(86)다.
지난 1일 서울 동쪽 변두리 한강변 언덕기슭 숲속에 놀랍게도 호크니가 수년간 꾸린 요술의 방이 들어섰다. 외벽에 ‘라이트 룸’이란 영문글자가 쓰여진, 가로 18.5m, 세로 26m, 높이 12m의 작지 않은 건물 안 방에 들어가면 전세계인의 눈과 마음을 울린 작가의 명작 이미지들이 신통방통 꾸물거리면서 흘러가고 튀어나오고 번지고 자라난다.
거대한 화면으로 확 증폭되어 다가오는 1970년대 명작들이 우선 애호가들의 눈에 불을 켜게 만든다. 동성애자인 그가 영국의 소수자 압박과 소외를 피해 1970년대에 미국 캘리포니아 엘에이로 이주한 뒤 새롭게 발견한 수영장의 이미지들. 풀 위를 찰랑거리는 물살의 투명한 선과 첨벙 뛰어드는 순간의 포말, 벌거벗은 채 물 속에 몸을 담군 남성 연인의 나신들이 거대하게 클로즈업 되어 사방벽을 채운다. 뒤이어 캘리포니아의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화가의 이젤 앞에 섰던 남녀군상의 명쾌하면서도 아련한 포즈들 또한 눈앞에서 명멸한다. 첨벙첨벙 물소리와 바그너풍 고전음악들도 함께 흐른다. 그의 무대예술 작품 중 일부인 숲속의 박쥐인간과 두꺼비인간이 날개짓하거나 펄쩍 뛰는 자연 무대의 풍경, 오페라 ‘투란도트’의 배경인 중국의 궁정과 왕과 공주의 모습들도 사뿐한 색과 형으로 펼쳐졌다.
갤러리 현대의 도형태 대표와 구준회 알타바 그룹 대표가 함께 만든 에트나컴퍼니의 운영공간으로, 서울 강동구 고덕동에 1일부터 개관한 라이트룸 서울이 화제다. 실내 대형 스크린에 펼친 호크니 작품의 미디어 동영상 무대의 압도적인 이미지 덕분이다. 풀장, 나무와 숲, 무대예술 등 작가 특유의 개성이 드러난 연작들의 거대 이미지가 사방벽과 바닥까지 번지고 스며들고 스펙터클한 음향과 음악효과가 가미된 몰입형(이머시브) 미디어아트 전시다. 올해 2월 영국 런던에서 개관한 라이트룸 런던에서 열렸던 전시를 직수입했다.
50분을 조금 넘는 동영상은 ‘원근법 수업’, ‘호크니, 무대를 그리다’, ‘도로와 보도’, ‘카메라로 그린 드로잉’, ‘수영장’, ‘가까이서 바라보기’의 6개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그의 초기작은 수영장 연작과 인간군상 연작 말고도 1980~90년대와 2000년대의 주요 작업들이 상당수 등장한다. 미국 콜로라도의 웅장한 그랜드캐년을 주홍빛·황토빛의 진득한 색채 덩어리 풍경으로 만들어버린 연작이나, 곡선이 주를 이루는 산야의 풍경과 광활하게 가지를 뻗어가는 숲의 고목, 그의 일상을 집요하게 시차를 두고 찍은 사진 콜라주, 그리고 서양 고전음악을 배경으로 이어지는 격정적인 무대예술의 세계 등을 음향과 영상, 육성이 일체를 이룬 몰입형 내러티브로 풀어나간다.
관객들은 방 바닥에 사선으로 흩뜨려지거나 뒤켠에 계단형으로 놓인 객석 위에서 사방과 천장 바닥을 번갈아보면서 그의 그림 속 색과 형에 휩싸이거나 빨려들어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작품을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갈무리한 이미지들과 그림의 바탕이 된 배경사진, 실제 영상, 애니메이션 등이 들어간 다큐멘터리적 성격이란 점에서 기존 고전 그림이나 스펙터클한 이미지들을 동영상으로 확장한 상업적 전시들과는 차별성이 뚜렷하다. 덧붙여 작가가 직접 육성으로 작품과 영상들을 해설(내레이션)하면서 주요 작품세계를 몇개의 키워드로 짚어 차근차근 설명해주는 것도 특징이다. 내년 5월31일까지.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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