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내어주는 마음에 관하여 [반려인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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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성수기가 다 지나간 여름의 끝이었다.
다 마신 요구르트병을 재활용한 화분 두 개, 식물을 살 때 주는 얇은 플라스틱 화분 여섯 개, 서울에서 치매안심센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받은 아기자기한 화분 하나, 그리고 빨간 꽃이 그려진 (개중에 가장 큰) 토분 하나.
식물들은 선반의 가장 높은 곳에 올려져 있었다.
당신 옷은 매일 똑같이 입으면서, 식물에게는 항상 가장 좋은 자리를 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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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성수기가 다 지나간 여름의 끝이었다. 고속도로는 별로 막히지 않았지만, 국도로 나온 뒤에 지리산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데 꽤 시간이 걸렸다. 집 근처라서 평소에 자주 보는 북한산처럼 깎아지른 바위 절벽은 없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하늘과 초록빛뿐인 지리산 한복판의 풍경은 지리산의 산세(山勢)를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서 본 개발구역들이나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아파트들과 비교되어서인지, 지리산의 풍경은 더욱 ‘자연’의 기운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인가가 드문 길을 한참 지나자, 은행 건물과 약초 시장이 보였다. 높지 않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할머니의 집은 그중에서 신축에 속하는 한 동짜리 빌라였다. 서로 다르게 생긴 비슷한 규모의 빌라 몇 채가 옆으로 줄지어 있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고, 할머니는 문을 열어주었다. 약간 당황하신 기색이었다. 얼마 안 있으면 우리가 도착한다고 1시간 전쯤 전화로 설명드렸건만, 할머니의 기억은 이제 그만큼 유지되지 못하는 듯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각자 다른 것을 확인했다. 어머니는 에어컨부터 살폈다. 더운데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서 확인해보니, 할머니가 두꺼비집을 열고 전기를 모두 차단해둔 상태였다. 서울 집 근처에 살 때도 할머니는 전기세를 아끼겠다고 난방을 꺼두곤 했다. 이제는 두꺼비집을 열어서 끄기까지 하시는구나, 생각했다. 어머니는 두꺼비집을 원래대로 돌려놓았고, 나는 막 나오기 시작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베란다로 향했다.
예상대로 그곳에는 화분이 여럿 있었다. 다 마신 요구르트병을 재활용한 화분 두 개, 식물을 살 때 주는 얇은 플라스틱 화분 여섯 개, 서울에서 치매안심센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받은 아기자기한 화분 하나, 그리고 빨간 꽃이 그려진 (개중에 가장 큰) 토분 하나. 그중에서 식물이 자라고 있는 건 두 개뿐이었다. 나머지는 비어 있거나, 흙만 있거나, 아니면 말라비틀어진 식물이 꽂혀 있었다. 요구르트병 화분에는 어디선가 꺾어온 작은 풀들이 있었다. 서울에서 꽃을 꺾다가 빌라 관리인에게 걸린 적 있는 할머니는 여기서도 거리의 풀을 꺾고 있었다.
다시 거실로 들어오니, 집 안 곳곳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식물들이 있었다. 나의 졸업사진,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당신 자식들의 사진 사이에도 가짜 식물이 있었고, 이제는 펼치지 않는 책이 가득한 책장의 맨 위에도 가짜 식물이 있었다. 그중 몇은 할머니의 병이 아직 많이 깊어지지 않았던 시기에 할머니가 오랫동안 살던 부산에서 함께 생활용품 매장에 가서 산 것이었다. 부산 집에서 할머니는 항상 식물을 키웠다. 물에서도, 흙에서도 식물이 자랐다. 어떤 녀석들은 바닥으로 가지를 뻗기도 했다. 이제 그 자리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식물들이 있다.
식물들은 선반의 가장 높은 곳에 올려져 있었다. 서울에서 지낼 때는 베란다가 없어서 할머니는 식물을 창문에 올려두었다. 돈을 아끼겠다고 난방은 꺼놓고서 식물 키운다고 창문을 열어놓으니 겨울에 특히 골치가 아팠다. 할머니는 언제나 작고 예쁜 것을 좋아했고, 세트 맞추기를 좋아했다. 당신 옷은 매일 똑같이 입으면서, 식물에게는 항상 가장 좋은 자리를 내주었다. 할머니의 울퉁불퉁한 화원. 벽에는 직접 그린 꽃 그림이 있었다.
안희제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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