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하마스 분쟁, 미국 내 유대인·무슬림 간 갈등으로 번져[글로벌 현장]
[글로벌 현장]
최근 미국 현지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의 분쟁과 관련해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미국 현지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 간의 갈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특히 750만 명가량의 미국 내 유대인 가운데 160만 명이 거주하는 뉴욕주와 뉴저지주에선 이 같은 긴장감이 극으로 치닫고 있다. 이들 지역에는 유대인만큼이나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뉴욕시에는 70만 명, 뉴저지엔 30만 명의 무슬림이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들은 유대인 억만장자들이 내는 기부금에 수익의 상당 부분을 의지하는 탓에 이번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분쟁에서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학생들이 이번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은 그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사람들을 탄압한 결과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이 같은 발언에 화가 난 고액 기부자들은 기부 철회에 나섰다.
대학에서 지역사회로 번진 긴장
미국 뉴저지주의 지역 경찰서, 국토안보부 직원, 교육청 직원 등은 10월 중순께 한 사건 조사에 나섰다. 지역 내 학교 칠판에 유대인을 위협하는 표현이 적혔다는 신고가 들어오면서다. 해당 표현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지역 내 학생들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 낙서가 “이스라엘을 없애라(Delete Israel)”라는 내용이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약 일주일이 넘는 기간의 조사 끝에 해당 글에는 범죄나 위협의 의도가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해당 내용을 확대 재생산하는 소셜미디어 글이 확산하면서 지역 교육청과 교사 등은 소셜미디어에 게시물을 올린 학생과 지역주민을 찾아 일일이 내려달라는 요청을 해야 했다. 글의 내용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도 문제였지만 해당 내용이 유대인이나 무슬림을 자극해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지역 내 유대인과 무슬림 간의 충돌 가능성 때문에 각 지역 경찰들은 초·중·고등학교 등하교 시간에 순찰을 강화하기도 했다. 카운티(county)와 보로(Borough) 등 지역자치단체의 행사도 갑작스럽게 취소됐다.
뉴욕 컬럼비아대는 10월 12일(현지 시간)부터 외부인의 캠퍼스 출입을 통제하기로 했다. 뉴욕 맨해튼 할렘 인근에 있는 컬럼비아대 캠퍼스는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대로변에 위치해 평소에도 외부인들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곳이다.
그런데 컬럼비아대가 출입 통제를 결정한 이유는 전날 이스라엘 학생이 도서관 앞에서 한 19세 여성에게 폭행당했기 때문이다. 뉴욕 경찰은 증오범죄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전날 하마스의 전 수장인 칼레드 메샤알이 전 세계 무슬림을 향해 10월 13일에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시위를 동시에 벌이라고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이다. 현재 카타르에 체류 중인 그는 “금요일에 아랍과 이슬람 세계의 광장과 거리로 나가야 한다”며 “이슬람 성전(지하드)을 가르치는 모든 학자, 배우는 모든 이들에겐 지금이 이론을 적용할 순간”이라고 말했다.
하버드대도 이스라엘-하마스 분쟁과 관련해 갈등의 중심에 있다. 하버드팔레스타인연대그룹(Harvard Palestine Solidarity Groups)은 지난 7일 이스라엘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33개 학생단체가 여기 서명했다. 이스라엘 정권이 모든 폭력 사태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지난 20년 동안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야외 감옥에서 살도록 강요받았다”며 “이스라엘의 폭력은 75년 동안 팔레스타인 존재의 모든 측면을 구조화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미국의 보수적 비영리단체인 ‘어큐러시 인 미디어’(AIC)는 하마스의 기습 공격 책임을 이스라엘로 돌렸던 미국 하버드대 학생들의 이름과 사진을 대형 전광판에 공개했다. 10월 12일(현지 시간) 엑스(X·옛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 따르면 하버드대가 위치한 보스턴 시내에 전날부터 대형 전광판이 설치된 트럭이 등장했다. 전광판에는 ‘하버드대의 대표적인 유대인 혐오자들’이라는 문구 아래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하마스의 공격은 이스라엘 책임”이라는 취지의 성명에 서명한 34개 하버드 학생 모임 회원들의 이름과 사진이 번갈아 게재됐다.
“팔레스타인 지지 학생 채용 안 해”
하버드대 학생 단체의 성명에 미 정치권과 하버드 동문 내에서 큰 논란이 일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 학생들이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하마스를 옹호하자 이스라엘 억만장자가 하버드대 산하 대학원 이사직을 사임했다. 이스라엘 최대 거부 중 한 명인 해운·화학 재벌 이단 오퍼와 아내 바티아는 하버드 케네디 공공정책대학원 이사직을 사임했다. 두 사람은 “이번 참사와 관련해 이스라엘을 비난한 학생조직들의 서한을 규탄하지 않은 (클로딘 게이) 총장의 충격적이고 둔감한 대응에 대한 항의로 사임을 결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논란이 커지자 하버드대는 10월 9일 성명을 냈다. 학생들의 성명은 학교의 공식입장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하마스를 직접적으로 규탄하지는 않았다. 이에 하버드대 동문 정치인과 래리 서머스 전 총장 등은 학교 측의 미온적 대응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게이 총장은 10월 10일 두 번째 성명을 통해 “최근 수일간의 사건들은 지속해서 파문을 일으키고 있으며 내가 하마스가 자행한 테러와 잔혹 행위를 규탄한다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며 “이 지역의 오랜 분쟁의 원인에 대한 개인적 관점이 어떻든 그런 비인간적 행위는 혐오스러운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논란은 멈추지 않았다. 헤지펀드계의 거물인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 캐피털 회장은 하버드대에 이스라엘 비난 성명에 서명한 학생 모임 출신자들의 명단 제공을 요구하면서 이들을 절대 채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에 공감하는 10여 개 기업 경영자들도 마찬가지로 이들에게 취업 불이익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성명에 참여했던 학생 모임 중 일부는 지지 입장을 철회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지지 움직임이 대학가에서 일자 자산가들이 대학 기부금을 끊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빅토리아 시크릿의 전 최고경영자(CEO)인 레슬리 웩스너와 그의 아내 애비게일이 설립한 웩스너 재단도 하버드대 기부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웩스너 재단은 “우리는 하버드 지도부가 무고한 이스라엘 민간인에 대한 야만적 살인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고 신물이 난다”고 밝혔다.
펜실베이니아대에선 ‘팔레스타인, 문학을 쓰다’는 제목으로 열린 캠퍼스 내 문학 행사가 도마에 올랐다. 이 축제에는 10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작가, 영화 제작자,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그중에는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한 전력이 있는 인물도 포함됐다.
이에 주중, 주러 미국 대사를 지냈던 존 헌츠먼은 자기 가족이 펜실베니아대에 기부하는 것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마크 로완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 최고경영자(CEO)는 “대학 지도자들은 사임하고 기부자들은 수표책을 닫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세계 유대인회의 회장이자 화장품 회사 에스티로더 창업주의 아들인 로널드 로더는 “학교가 반유대주의에 맞서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기부를 중단하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들의 기부 중단은 장기적으로 하버드대나 펜실베이니아대에 재정적 피해를 줄 가능성이 크다. 자선 활동은 하버드대 수익에 가장 크게 기여하는 부문으로, 지난해 수입 58억 달러의 45%를 차지했다. 펜실베니아대는 지난해 수입 144억 달러 중 1.5%를 자선 기부에 의지했다. 나머지 수입은 병원 운영사업으로 발생했다.
뉴욕(미국)=박신영 한국경제 특파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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