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기 전문가 헤커 “미국의 압박정책이 북핵 위기 키웠다” [책&생각]
핵의 변곡점
핵물리학자가 들여다본 북핵의 실체
시그프리드 헤커 지음, 천지현 옮김 l 창비 l 3만원
‘핵의 변곡점’은 미국의 저명한 핵물리학자이자 핵무기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80, 로스앨러모스국립연구소 명예소장)가 복원한 ‘북-미 핵 협상 30년 역사’다. 헤커는 2004년부터 2010년까지 해마다 한 차례씩 북한 영변 핵시설을 방문해 북한 핵 개발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 분야 최고의 서방 전문가다. 이 책에서 헤커가 내놓은 핵심 물음은 이것이다. ‘미국 정부는 북한의 핵 개발을 저지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왜 그 기회를 번번이 놓치고 말았는가?’ 헤커는 북-미 핵 협상의 결정적 순간들을 통해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는다.
북핵 문제는 1993년 북한이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본격화했다. 이후 미국을 비롯한 관련국들은 북한 핵개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나 북핵 위기는 오히려 커졌다. 왜 해결의 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났는가? 이 난마 같은 물음의 답을 찾으려면 먼저 북한의 ‘이중경로 전략’을 이해해야 한다고 헤커는 강조한다. ‘이중경로 전략’이란 ‘핵개발’과 ‘외교’라는 두 가지 전략 노선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1990년대 초 냉전 말기부터 북한이 선택한 생존 전략은 미국과 화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화해는 힘을 바탕으로 해야만 가능하다고 북한은 판단했다. 외교와 핵개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노선을 동시에 추구함으로써 한쪽 노선의 실패에 대비하려고 한 것이다. 이후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지도자들은 이 이중경로 전략을 일관성 있게 유지했고, 이 전략에 따라 외교를 통한 화해의 길이 보이면 핵개발을 늦추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런 이중경로 전략을 알아보지 못한 채 오로지 북한 비핵화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헤커는 미국 정부가 처음부터 ‘외교냐 핵개발이냐’ 하는 양자택일을 강요하며 협상의 중간지대를 없애버렸음을 여러 실증 자료를 통해 밝혀낸다.
헤커는 미국 정부가 북한의 이중경로 전략에 대응하는 데 실패한 결정적 지점들을 ‘변곡점’이라고 부르며, 자신이 북한을 처음 방문한 2004년 이후의 상황을 상세히 복원한다. 그 20년 가까운 시기 동안 북한의 핵 정책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미국 정부는 결정적인 변곡점마다 어떤 오판을 내렸는지, 그리하여 북한이 어떻게 더욱 강력하고 정교한 핵무력을 구축하게 됐는지를 분석한다. 이 책의 핵심은 ‘미국이 외교 노력으로 이룬 합의가 북한의 거듭된 위반으로 무산되고 말았다’는 통념을 깨뜨리는 데 있다. 시선을 미국 정부 내부로 돌려 워싱턴이 해온 일을 비판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핵위기 심화의 원인이 북한이 아니라 미국에 있음을 밝혀내는 것이다.
헤커는 김정은과 도널드 트럼프의 유례없는 소통 방식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절호의 기회를 주었음도 강조한다. 하지만 북한을 변화로 이끌어내는 듯했던 트럼프도 결국 북한을 최대한 압박하는 전략을 포기하지 않았고 지난 수십년 동안 실패만 거듭해온 정책을 더 거세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가 2019년 하노이 정상회담 실패였다. 이 실패야말로 미국이 구사해온 전략의 실패를 보여준다고 헤커는 지적한다. 이후 북한은 미국과의 화해라는 전략 노선을 바꾸어 핵무력 개발에 더 박차를 가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통해 활로를 찾아 나가고 있다.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헤커는 트럼프 정부를 이은 바이든 정부의 ‘점잖은 무시 정책’도 비판한다. 이런 무시 정책으로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려던 30년 동안의 노력을 마침내 청산하는 방식으로 북한의 근본적인 정책 변화가 이뤄지고 있다.” 그리하여 “북한은 남한과 일본을 위태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미국 본토까지 위협할 정도로 핵무력을 강화해 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헤커는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북한이 “실용적이기도 하거니와 변화하는 환경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는 면모를 보여왔다”는 것, 그리고 북한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김정은이 잘 알고 있으리라는 것이 그 희망의 근거다. 다만 그 희망을 키워 나가려면 이 책에 기술된 쓰라린 교훈을 협상 당사자들이 잊지 말아야 한다고 헤커는 강조한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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