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자의 검 대신 의사의 칼 물려준 사형집행인 [책&생각]
사법 체계 변화 속 명예 추구했으나
뿌리깊은 차별 벗어나지 못한 수치
현대인의 우월의식 과연 정당한가
뉘른베르크의 사형집행인
16세기의 격동하는 삶과 죽음, 명예와 수치
조엘 해링톤 지음, 이지안 옮김 l 마르코폴로 l 3만원
신성로마제국의 비공식적인 수도라 불릴 정도로 번성했던 독일 뉘른베르크 시내에는 ‘사형집행인의 다리’가 있다. 사형을 앞둔 죄수들이 사형장으로 향하며 건넜을 이 다리는 오늘날 관광명소가 되어 ‘야만적인 과거’를 더듬게 하는 용도로 쓰인다. 현대인의 우월감에 기댄 이 기억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시대를 넘어 경멸과 공포의 대상으로 고착된 사형집행인의 진정한 형상은 무엇이었으며, 한 인간으로서 그는 과연 어떤 것을 느끼고 생각했을까?
미국의 역사학자 조엘 해링턴의 ‘뉘른베르크의 사형집행인’은 16세기 뉘른베르크에서 40년 넘도록 사형집행인으로 일한 마이스터(장인) 프란츠 슈미트(1553·1554~1634)가 남긴 직업적인 기록을 읽어나가며 그의 삶과 내면, 그리고 당시의 시대상을 재현해낸 책이다. 사형집행인의 회고록은 근대 초 인기 있는 장르로 읽힌 적 있으나 프란츠의 기록은 그리 널리 알려지진 못했고, 지은이는 뉘른베르크의 한 서점에서 이를 발견한 뒤 그 내용을 철저하게 파고들었다고 한다.
프란츠 슈미트가 살았던 시기 사람들은 유행병, 기후변화, 흉작과 기근 등 열악한 자연환경과 강도와 납치 같은 일상적인 폭력 아래 놓여 있었기 때문에 “삶의 모든 국면에서 위험에 봉착한 이들은 안전과 질서를 갈구”했다. 통치 권력은 사람들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범죄자들은 반드시 체포되고 처벌받는다는 식의 사회 정의를 구현하고자 했는데, 이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바로 숙련된 사형집행인이었다. 뉘른베르크처럼 번영한 도시국가는 사법 정의의 체계를 만들고 이를 집행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밤베르크 형법전’(1507), ‘카롤리나 형법전’(1532) 등 신형법은 범죄 유형을 정교화하고 일정한 사법 절차와 규율을 확립했는데, 정규 봉급을 받는 전문 사형집행인의 존재를 규정하기도 했다. 프란츠에게는 “새로운 기회의 시대”였던 셈이다.
어쩌다 강제로 사형집행인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쩔 수 없이 사형집행인이 된 프란츠는 밤베르크에서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며 1573년 열아홉 나이로 첫 처형을 집행했고, 1578년 뉘른베르크에서 종신 사형집행인으로 임명받은 마이스터가 됐다. 야심이 남달랐기에 사형집행인으로서 실력을 키우는 한편 술을 아예 끊고 ‘방종한 무리’와 절대 어울리지 않는 등 “규율에 능하고 법을 준수한다”는 평판을 갈고닦았던 결과였다. 프란츠에겐 자신의 숙명 같은 직업에 대한 반감과 자부심이 모두 있었으며, “이러한 이중적인 감정은 그가 직업 성공의 가도를 달리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내적 갈등을 겪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바라던 개인적인 영달과 직업적 보상을 포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기본 봉급이 당시 뉘른베르크 상위 5% 노동자에 해당할 정도로 전문 직업인으로 인정받았으나, 그렇다고 천형 같은 사회적 모욕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는 얘기다. ‘불경스러운’ 직업을 지닌 사형집행인은 오래전부터 배제와 혐오의 대상이었다. 공인된 전문 사형집행인일지언정, 성 안에 거주할 수 없었고, 시민권을 얻지 못해 길드 가입, 공직 복무, 법정 증인 등 공적인 행위도 인정받지 못하며, 교회뿐 아니라 목욕탕, 선술집 등 공공장소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는 등 ‘사회적 모욕’은 일상적이었다.
프란츠의 기록 자체는 개인의 감상 등 군더더기가 전혀 없이 언제 어떤 범죄자를 어떻게 처형했다 식의 무미건조한 직업 일기다. 지은이는 이 앙상한 기록으로부터 당시의 시대상과 사법 체계, 그리고 프란츠의 내면까지 읽어낸다. 사형집행인의 일은 크게 심문과 처벌이었다. 당시의 심문은 오늘날 고문이기에 용의자를 비교적 건강한 상태로 유지시키는 일 또한 사형집행인의 몫이었고, 프란츠는 그렇게 쌓은 해부학적·의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치유사’(사실상 의사)를 부업 삼았다. 처벌은 통치 체제가 종교적 구원과 국가 권위라는 핵심 메시지를 앞세워 사람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마련한 ‘공포의 극장’, 곧 공개처형을 문제없이 상연하는 일이었다. 생매장, 화형, 교수형, 가장 참혹한 수레바퀴형 등과 달리 참수형은 사형자의 영예를 지켜주는 형벌이었다. 참수하다 목을 제대로 잘라내지 못하는 등 실수라도 하면 사형집행인은 성난 군중들의 린치를 당하기도 했다.
“프란츠의 검을 잘 다루는 기술(참수형)은 직업적 정체성의 뿌리였고, 그가 한결같이 싫어했던 경멸적인 명칭인 ‘목매다는 사람’(교수형)이 하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프란츠는 고문이나 수레바퀴형 등 군중이 원하는 스펙터클보다 사법 집행자라는 전문 직업인이란 데에 자부심을 가졌다. 스스로 평판에 매달렸던 것처럼, 막연히 신 또는 국가에 복종하지 않는 범죄보다 ‘사적인 신뢰’를 배반하는 악의적인 범죄를 더 경멸했다. 개인의 정체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이런 인식은 형법에 스며 있는 제국의 논리와는 어딘가 다른 것이었다. 경력 후반부에 이를수록 프란츠의 기록은 점차 범죄의 배경이 무엇인지 파고드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프란츠는 사형집행인 취임 15년을 맞아 의회에 시민권을 달라고 청원해 인정받았고, 은퇴 뒤인 1624년에는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게 가문의 명예를 돌려달라는 청원을 냈다. 황제에게 보낸 청원서에서 그는 오랫동안 강요된 직업에 따라 그와 가족을 괴롭혀온 ‘수치심’을 토로하며, “의학이야말로 나의 천직으로, 뉘른베르크와 이웃 도시에서 1만5천명이 넘는 주민들을 치료해왔다”고 썼다. 그의 청원은 수리되었고, “그가 아들들에게 물려줄 유산은 처형자의 검이 아니라 의사의 메스가 됐다.” 프란츠의 생애에 대해 지은이는 “동시대인들이 대부분 수긍했던 계층제의 숙명론을 거부하고, 삶의 더 명예로운 위치로 나아가기를 바라며 직접적인 행동의 길을 개척했다”고 평가한다. 그런 과정 속에 프란츠에게 드러난 “개인의 정체성에 관한 근대적 개념”은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제시한 ‘인본주의’와 상통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책은 현대인이 자랑하는 “우월한 합리성과 교양”에 의문을 제기한다. ‘잔인하고 야만적인’ 16세기의 사형집행인이 인종학살, 원자탄 투하, 전면전 같은 현대의 만행을 본다면, 과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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