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에서 전하는 이야기, SF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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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로 잘 알려진 마거릿 애트우드는 '나는 왜 SF를 쓰는가'의 서문에서 에스에프라는 장르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한다.
애트우드는 애초에 촉수 달린 외계인들이 등장하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이야기들을 에스에프라고 생각했지만, 르 귄은 작품을 쓸 당시에는 불가능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일어날 법한, 예를 들면 쥘 베른의 소설들과 같은 이야기를 에스에프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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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실의 과학과 문장들]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장강명 지음 l 문학동네(2023)
‘시녀 이야기’로 잘 알려진 마거릿 애트우드는 ‘나는 왜 SF를 쓰는가’의 서문에서 에스에프라는 장르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한다. 특히 어슐러 르 귄과 벌어진 논쟁은 작가들 사이에서도 상이한 견해를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애트우드는 애초에 촉수 달린 외계인들이 등장하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이야기들을 에스에프라고 생각했지만, 르 귄은 작품을 쓸 당시에는 불가능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일어날 법한, 예를 들면 쥘 베른의 소설들과 같은 이야기를 에스에프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르 귄은 전자를 ‘판타지’로 분류했다.)
최근 한국에서도 에스에프를 쓰고 읽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대체로 애트우드보다는 르 귄이 생각하는 장르에 가까운 작품들이다. 소설집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의 저자 장강명 역시 ‘작가의 말’에서 외계문명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 데에 크게 관심이 없다고 밝힌다. 대신 에스에프를 통해 동시대의 사람들이 처한 문제들, 그리고 근미래에 벌어질 법한 일들을 상상하며, 그 속에서 기술이 어떻게 사회제도나 문화와 얽히고설키는지,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변질”되는지 포착하는 것이 목표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는 이런 소설을 ‘STS SF’라고 부르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STS는 과학기술과 사회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과학기술학(Science Technology Studies)을 일컫는 말이다.
장강명이 만들어 낸 세계에서 과학기술은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문제는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다. 지지하지 않는 대통령이 당선되었다는 사실처럼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욕망(‘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폭력과 참사와 관련된 처벌과 보상, 용서와 화해 사이의 날 선 대립들(‘알래스카의 아이히만’). 아마도 인류의 역사와도 함께했을 지난한 문제들에 대해서, “돌파구는 뜻밖에도 과학계에서 왔다.” 못생긴 것은 아름답게, 비난과 욕설은 칭찬으로, 사실 정보는 입맛에 맞게 전달하는 기계 ‘옵터’는 현실을 회피하고픈 욕망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실현시킬 수 있게 도와준다. DNA 이중나선 구조보다 더 혁명적이라는, 노벨상 수상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기억 세포’ 발견은 타인의 기억을 이식할 수 있는 ‘체험 기계’ 개발로 이어진다.
‘옵터’나 ‘체험 기계’는 소설 속 인물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다만, 욕망과 상상을 실현 가능하게끔 한다. 기계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이러한 해결 방식은 사람들의 관계, 제도, 감정 등과 얽혀 문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든다. 사람들의 본질은 기술로 인해 변하기보다는 오히려 강화된다. 저자 장강명은 그가 ‘STS SF’라고 이름 붙인 이 소설들 속에서 이러한 ‘얽힘’의 다양한 모습들을 펼쳐 보인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에서는 가상 현실이나 신체 증강 기술과 관련된 상상이 특히 돋보인다. 창작의 고통을 겪는 작가는 우연히 뇌과학자가 개발 중인 기구를 사용한 후 끊임없이 쓸 수 있게 된다.(‘사이보그의 글쓰기’) 생존을 위해 살생을 피하고 싶은 사람들은 비용과 수고를 감수하고 강화 엽록체세포 이식을 통해 스스로 영양소 합성을 시도한다.(‘나무가 됩시다’) 인공지능(AI)이 만들어낸 창작물의 창의성이나 채식주의와 동물권 이슈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일어나지 않을 법한 이야기와 우리가 겪는 이야기 사이, 그 어딘가에서 에스에프는 과학기술과 우리의 이야기를 탐험하고 있다.
강연실 국립중앙과학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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