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뜰] 벼를 베고 고구마를 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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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노란 버스가 줄줄이 들어왔다.
오늘은 전남 곡성에 사는 유치원생들이 추수 체험을 하는 날이다.
어린이들은 신바람을 내는데, 몇몇 교사는 손 모내기에서부터 홀태를 이용한 탈곡까지 옛날 방식의 논농사를 왜 체험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오늘 할 벼베기와 탈곡에 집중해서 들여다보자면, 이 청명한 가을에 유치원생들은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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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태 이용한 옛날식 탈곡 통해
자연과 깊게 관계 맺는 법 배워
밥 지어먹으며 쌀알 몸에 들여
헤어짐 뒤에 오는 새로운 만남
매 농사마다 기대감 부풀게 해
아침부터 노란 버스가 줄줄이 들어왔다. 오늘은 전남 곡성에 사는 유치원생들이 추수 체험을 하는 날이다. 신청한 원생이 180명을 훌쩍 넘겼다. 60명씩 사흘로 나눠 논으로 나갔다. 늦봄에는 함께 모를 심었고, 여름에는 논에 사는 다양한 생물을 이미 관찰했기에, 아이들은 유치원 이름이 붙은 팻말을 익숙하게 찾아가서 섰다.
가을볕에 쑥쑥 자라 낟알들이 무겁게 달린 벼에 먼저 인사를 건넸다. 유치원마다 품종을 다르게 심은 덕분에, 모양도 색깔도 차이가 나는 벼를 비교하며 살필 기회까지 얻었다.
어린이들은 신바람을 내는데, 몇몇 교사는 손 모내기에서부터 홀태를 이용한 탈곡까지 옛날 방식의 논농사를 왜 체험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렸다. 농기계에 맡기면 될 일 아니냐는 인식이었다.
살면서 기적을 경험한 적이 있느냐고 그들에게 물었다. 없다는 답을 들은 후, 모 한포기를 심어 거기서 1000개의 낟알을 거두는 것이야말로 기적이라고 설명했다. 한알이 1000알이 되는 과정을 언제 어디서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볼 수 있느냐고 되묻기도 했다.
덧붙여 손 모내기부터 전통 방식의 탈곡을 하는 과정은 관계를 배우는 각별한 방식이라고 강조했다. 사람끼리 지킬 예절은 각 가정과 유치원에서 다양하게 가르치지만, 사람과 야생동물, 사람과 식물, 사람과 무생물의 사귐에 관해 깊이 거듭 고민할 기회는 많지 않다.
제 손으로 모를 심고, 벼가 자라는 논에 사는 다양한 곤충과 작은 동물을 본 후, 익을 대로 익은 벼를 가을에 만지면, 농작물을 기르는 마음이 저절로 자라난다. 벼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고, 벼의 고통이 내 고통이 되는 것이다.
오늘 할 벼베기와 탈곡에 집중해서 들여다보자면, 이 청명한 가을에 유치원생들은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봄과 여름에 애써 기른 벼의 생명을 가을에 앗는 것이다. 농부는 왜 정성껏 기른 농작물을 베어야만 하는가. 벼를 벨 때나 베고 난 벼를 품에 안을 때, 어린이들은 이 본질적인 물음 앞에 선다. 수확의 기쁨에 웃다가 차오르는 슬픔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네살 어린이부터 탈곡을 시작했다. 홀태 앞에 앉기 전부터 어깨에 힘을 잔뜩 줬다. 이것은 또 다른 이별이다. 벼에서 내내 붙어 있던 낟알들을 떼어내는 것이다. 둘로 나뉜 뒤엔 다시 붙을 수 없다. 볏짚은 볏짚끼리 모이고 낟알은 낟알끼리 모인다.
줄 서서 기다리던 일곱살 어린이가 네살 어린이에게 충고하듯 말했다. “겁먹지 마. 내가 3년이나 해봤는데, 어렵지 않아. 두 손으로 벼를 꽉 쥐고 힘껏 당기기만 하면 돼.”
벼베기와 탈곡이라는 두번의 이별을 겪은 아이들에게 낟알을 한움큼씩 줬다. 껍질을 벗겨 밥을 지어 먹으면, 낟알은 우리의 몸으로 들어와 피도 되고 살도 된다. 새로운 만남이다. 여기까지 알려주면 울상을 짓던 어린이들 입가에 웃음이 맴돈다. 이별의 안타까움과 함께 만남의 반가움까지 느끼고 상상하는 것이 바로 추수 체험이다.
유치원생들을 돌려보낸 후 점심을 먹고, 오후엔 텃밭으로 왔다. 120일 동안 기른 고구마를 캘 때가 왔다. 장편 퇴고를 하느라 6월 하순에 고구마순을 심는 바람에 수확도 늦었다. 낫으로 순부터 걷어내기 시작했다. 발부리에 닿는 걸 들고 보니 애호박이다. 여름에 심은 호박씨 두개가 고구마밭까지 덩굴을 뻗어 어린 호박을 다섯개나 숨겨둔 것이다. 가지 두개를 따 먹으며 갈증을 지웠다.
모종을 하나 얻어 길렀는데, 거기서 거둔 가지가 벌써 서른개였다. 호미를 고쳐 쥐며 생각했다. 벼와 호박과 가지에 이어, 네 이랑에 심은 고구마들은 또 어떤 기적을 내게 보여줄까.
김탁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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