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의 입술 위에서 태어난 시인의 이름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곤조곤 얘기해 봅니다. 한국상담대학원 대학교 교수이자 다수의 철학서를 펴내기도 한 진은영 시인과 20년 이상 출판 편집 기획자 생활을 거쳐 온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 금요일 글을 씁니다.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슬픔의 끝에는 언제나
열려 있는 창이 있고
불 켜진 창이 있다.
언제나 꿈은 깨어나듯이
충족시켜야 할 욕망과 채워야 할 배고픔이 있고
관대한 마음과
내미는 손 열려 있는 손이 있고
주의 깊은 눈이 있고
함께 나누어야 할 삶
삶이 있다.
- 폴 엘뤼아르, '그리고 미소를'
폴 엘뤼아르(1895-1952)의 이 유명한 시는 마지막 시집 '불사조'(1951)에 실려 있다. 시는 매우 낙관적이다. 밤은 결코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내가’ 말한다. 그런데 그리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내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다. 밤을 완전히 깜깜한 시간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나는 무언가 할 거라는 용감하고 실천적인 선언이다. 그러나 시인이 처음부터 삶을 낙관적으로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다.
1913년 스위스의 한 폐결핵 요양소에서 열일곱 살 소년이 한 러시아 소녀를 만났다. 20세기 초에 결핵은 도시 인구 100명당 7명의 사망률을 보이는 무서운 질병이었다. 두 사람이 만난 요양소는 전문적인 치료 방식과 고급 시설로 명성을 떨치던 곳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치명적인 병에 걸린 외동아들 외젠 그랭델을 위해 치료에 드는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소년은 과보호 속에서 병약한 귀염둥이로 자랐고 요양소에 올 때도 엄마와 함께였다. 그는 마른 몸매에 큰 키, 아이의 맑고 부드러운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이 ‘폴 엘뤼아르’라는 이름을 갖기 위해선 운명적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직 예감하지 못한 눈빛이었다.
두 살 많은 소녀 엘레나 디아코노바 역시 폐병 환자였다. 그 시절 부유한 집 딸들은 시중드는 여성 하인인 ‘샤프롱’을 대동하고 다녔다. 그런데 엘레나는 모스크바에서부터 혼자 천 킬로미터의 기차 여행을 감행해 그곳에 왔다. 이 유별난 소녀는 강인한 턱에 오만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핵 때문에 몹시 날씬했지만 그건 당시에는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그해에 한 신문 별책부록으로 발행된 '여성세계'에는 환상적인 주름이 잡힌 이브닝드레스 광고가 실렸는데 주문 가능한 히프사이즈가 116, 112, 108, 104, 100, 96뿐이었고, 그 아래 치수는 상상하기 힘들었다(96이면 요즘으로 치면 L 사이즈다). 편집부는 그 광고에 상당히 동정심이 넘쳐나는 문구를 덧붙였다. “가냘프고, 깡마른 여자들이 옷을 맵시 있고 유행에 맞게 입기가 늘 쉽지는 않죠. 이럴 때는 타협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의 실패를 멋진 주름으로 숨기는 것입니다.” '1913년 그해 여름'을 쓴 플로리안 일리스는 당시에는 날씬함이 자연의 실패이자 일종의 불행으로 여겨졌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패로 여겨지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엘레나는 시대가 요구하는 히프사이즈와는 무관하게 자신만만했다. 혼자서 책을 읽고 있는 외젠에게 먼저 말을 건넨 것도 그녀였다. 엘레나가 외젠의 옆얼굴을 스케치한 후 “열일곱 살짜리 시인, 어느 청년의 초상”이라고 적은 그림을 보낸 것을 계기로 둘은 급격히 친해졌다. 엘레나는 자신을 ‘갈라’라고 소개했다. 어머니가 그녀를 부를 때 쓰던 이름이었지만 러시아인들이 듣기에는 괴상한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독특한 이름으로 불리기를 선택했고 어디서나 그 이름을 사용했다.
외젠은 갈라를 만나기 전부터 시를 쓰긴 했다. 그의 아버지는 “내 아들, 내 아내, 나 이외에는 모두 파리 떼!”라는 놀라운 좌우명을 가진 가족 제일주의자였고 아들이 건강을 회복하고 나면 토지매매 업무를 배워서 분양업자가 될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러니 아들이 부유한 파리지앵으로 사는 대신 ‘꿈을 새기다가 배고파 죽는 시인’으로 살고 싶다고 솔직히 말했다면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외젠은 갈라에게 그의 두려운 마음을 고백하고 시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당신은 위대한 시인이 될 거예요”라는 격려와 동시에 신랄한 비평을 들었다. 갈라는 멋 내는 걸 좋아했지만 그만큼이나 문학을 사랑했고 지독한 책벌레인 데다 몹시도 정직한 독자였다. 외젠의 작품은 그런 연인과의 대화 속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1913년 12월에 그는 한 문학잡지에 '성녀들'이라는 시를 발표하면서 ‘폴 엘뤼아르 그랭델’이라는 필명을 썼고, 이후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랭델’이라는 성도 떼어버렸다. ‘엘뤼아르’는 외할머니의 성을 딴 것이라고 한다. 그 뒤로 갈라는 그를 ‘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연인의 입술 위에서 그가 원했던 이름, 시인의 이름이 태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1917년 봄에 결혼식을 올렸다. 아버지는 갈라를 못마땅하게 여겨 결혼을 반대했다. 갈라와의 결혼은 아들이 문학적인 삶과 결합한다는 뜻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승리했다! 갈라는 폴에게 ‘우리의 삶은 소시민의 인습적인 삶과는 다를 것’이라고 말했다. 폴은 1차 대전으로 징집된 후 육군병원에 배치되었고, 끝도 없이 실려 오는 부상병들을 간호하며 전사자의 소식을 가족에게 알리는 괴로운 임무를 맡고는 침울해져 갔다. 그때마다 갈라는 편지에 반복해서 썼다. “약속할 수 있어. 우리의 삶은 영광스럽고 멋진 것이 될 거야!”
폴은 갈라의 열정적인 확신에 기대어 전쟁의 참혹함을 버틸 수 있었다. 1918년에 발표한 시에서 그는 노래한다. “나는 오랫동안 쓸모없는 얼굴을 갖고 있었어, /하지만 지금 /나 사랑받기 위한 얼굴을 갖고 있네, /나 행복하기 위한 얼굴을 갖고 있네.”('평화를 위한 시들'VIII) 이제 그는 스스로가 사랑할 수 있는 얼굴을 찾았다는 걸 확신하는 것 같다. 그리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게 되자 그의 곁에는 더 많은 친구가 생겨났다. 앙드레 브르통, 필리프 수포, 루이 아라공… 100년 뒤 위대한 초현실주의 그룹의 일원으로 언급될 젊은 시인들이었다. 초현실주의 그룹에는 막스 에른스트나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화가들도 함께했다.
폴은 '셀레베스의 코끼리'를 그린 막스 에른스트에게서 천재성을 느꼈다. 당장 그림을 구입했고 일주일을 함께 보낸 뒤엔 잘생긴 금발의 독일 화가에게 반해버렸다. 그리고 프랑스에 와서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 그 친구를 자기 집에 머물게 했다. 열정적인 만남 속에서 또 한 번 위대한 예술이 탄생하고 있었다. 1922년 폴은 막스와 함께 시를 공동창작해서 '불사신들의 불행'을 냈고 막스는 초현실주의자들의 모습을 담은 대작 '친구들의 만남'을 그렸다. 그러나 우정의 공동체 속에서 문제가 싹트고 있었다. 갈라의 사랑이 위대한 시인과 위대한 화가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게 된 것이다. 폴은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 역시 갈라에 대한 사랑도 막스에 대한 모호한 우정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사랑의 야단법석에서 '한순간의 거울'이라는 아름다운 시가 나온 것일까? “그것의 섬광은 그 어떤 갑옷이나, 그 어떤 가면도 / 일그러뜨릴 만큼 찬란하다. / (……) / 새는 바람과, / 하늘은 그것의 진실과, / 인간은 그의 현실과 뒤섞였다.” 영원한 단 하나의 사랑, 영원한 단 하나의 우정이 시인 안에서 뒤섞였다. 분명한 감정들, 경계들을 뒤섞어버리는 찬란한 섬광, 우리는 언젠가 그것과 마주치게 된다.
1934년에 갈라와 폴은 이혼했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은 떠났다. 그러나 사랑이 준 것은 그대로 남았다. 갈라가 가진 불굴의 낙관을 그는 배웠고 자신의 삶과 예술에서 실현하려고 애썼다. “하늘이 나를 버려 불을 피웠네, /친구가 되기 위한 불, /겨울밤을 지내기 위한 불,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불을.”('이곳에 살기 위하여') 2차 대전 중에 쓰인 이 시구들에는 젊은 날 그에게 내밀어진 손들의 뜨거움과 깊이 호흡했던 사랑의 숨결이 여전히 살아 흐르고 있다.
* 갈라와 폴에 대한 이야기는 '세 예술가의 연인'(도미니크 보나, 김남주 옮김, 한길아트)을 참조하고 인용했다.
진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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