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윤의 대안 모색] 오! 홍범도
‘야 이놈들아/내가 언제 내 동상 세워 달라 했었나/왜 너희들 마음대로 세워놓고/또 그걸 철거한다고 이 난리인가./내가 오지 말았어야 할 곳을 왔네./나, 지금 당장 보내주게/원래 묻혔던 곳으로 돌려보내주게/나, 어서 되돌아가고 싶네./그곳도 연해주에서 머물다가/함부로 강제이주되어 끌려와 살던/남의 나라 낯선 땅이지만/나, 거기로 돌아가려네’.
이동순 시인이 쓴 ‘홍범도 장군의 절규’ 중 일부다. 꿈에 그리던 해방 조국의 땅에 백골을 누이는 안식마저 앗긴 장군의 처절한 외침이 귓전을 때린다. 비록 고국 강토지만 청산되지 않은 친일의 역사, 그 모멸과 능욕 속에 사느니 남의 하늘 아래가 맘 편할 것이라는 장군의 울분이 가슴을 친다. 최근 일어난 홍범도 장군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경악스러움을 넘어 참담하기까지 하다.
우리 5000년 역사상 가장 빛나고 통쾌했던 승전보 중 하나인 봉오동·청산리대첩을 이끈 주역, 암울한 일제강점기 나라를 뺏긴 백성들에게 광복의 희망을 놓치지 않게 했던 홍범도 장군. 장군은 온전하게 조국에 헌신한 불굴의 전사로 항일 무장투쟁의 신화였다. 갖은 고초를 달게 받으며 구국의 일념 하나로 바람처럼 대륙을 내달리며 조국 광복에 온몸을 바친 우국충정을 삼척동자도 다 안다.
이태 전 광복절에 온 국민의 열망에 힘입어 어렵사리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왔다. 선열의 희생에 무심했던 우리들의 오랜 부끄러움을 벗게 하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국군의 중추 육군사관학교에 흉상을 세우고 장군의 애국단심을 본받게 하는 것 역시 옳은 일이었다. 날마다 생도들이 장군의 고결한 조국애 앞에서 나라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며 올곧게 배우는 모습은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울림의 큰 장군의 삶은 남달랐고 애국충정은 그 누구보다 뜨거웠다.
머슴의 아들로 태어난 장군은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지만, 국권을 상실한 조국의 비극적 역사 전면에서 광복을 향한 무장투쟁을 펼쳤다. 혹독한 항일투쟁의 전선에서 아내와 자식마저 조국의 제단에 바쳤다. 신출귀몰한 군사작전으로 야만적인 일제의 전선을 부수며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특히 유격전에 뛰어나 일본군마저 ‘비장군(飛將軍) 홍범도’로 부를 만큼 장군의 활약상은 두드러져 끝내는 봉오동·청산리대첩의 금자탑을 쌓았다.
말년에는 연해주에서 멀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하는 비극적 운명 가운데서도 동족들을 하나같이 아끼고 기꺼이 심부름꾼이 됐던 장군이다. 참담한 현대사에 맞서서 누구보다 강력한 의지로 싸우고 온갖 질곡을 고스란히 짊어진 채 낯선 하늘 아래서 삶을 마감한 비운의 투사, 홍범도 장군의 전설 같은 전투력과 인간을 초월한 의지는 우리에게 애국의 길이 뭔지를 일깨워준다.
그런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육사 교정에서 철거돼 쫓겨난다. 장군의 뜨거운 애국단심이 망나니처럼 휘두르는 이념의 채찍에서 홀대당하고 있다. 지난달부터 육사는 교정 내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하고, 홍범도 장군과 더불어 일곱 분의 애국지사를 기리는 독립전쟁 영웅실 폐쇄에 나섰다. 이유인즉슨 특정 시대 몇몇 인물에 편중된 국난극복사를 전시대에 걸쳐 새롭게 구성한다지만 참으로 군색하고 어처구니없는 변명이 아닐 수 없다.
지난달 23일 국정감사에서 육군총장은 “홍범도 장군 흉상은 육사 생도들의 대적관을 흐리게 한다”며 “육사는 광복운동, 항일운동하는 학교가 아니다”는 망언을 내뱉었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공산당 이력을 문제 삼은 것이다. 홍범도 장군의 소련공산당 가입은 당시 항일투쟁의 기지로서 연해주를 확보하고 원활한 독립운동을 지원받기 위해서였다. 역사적 맥락은 뚝 잘라먹고 장군의 궤적을 북한 공산당과 동일시하는 이분법적 역사인식은 천박하기 그지없다. 또 자유시사변도 문제시하는데, 그 역시 충분한 근거가 없는 일방적 왜곡으로 홍범도 장군을 소련의 일개 적군(赤軍)으로 모는 처사이다.
어쩌면 홍범도 장군 흉상의 육사 추방은 이 정부 들어서면서 예고된 일이 아닌가 싶다. 일제 식민지의 근대화론을 강변하고, 헌법에도 명기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항일투쟁을 가볍게 여겨 폄훼하고, 위안부를 매춘부로 매도하며 박정희 군사독재를 미화하는 이른바 뉴라이트들이 대거 등용될 때부터 이 정부의 역사전쟁 조짐이 보였다.
홍범도 장군을 둘러싼 일련의 사태는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기획된 역사 도발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국정교과서 등 실패한 역사 쿠데타를 오늘 다시 획책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것이 무엇보다 대한민국 국군의 요람인 육사와 항일투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을 고리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무모한 도발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는 일제 만주군관학교의 그림자도 아니고 친일 이력 장성들의 추억도 아니다. 육사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군사 반란을 일으킨 정치군인들만의 모교도, 특정 정부의 입맛에 좌우되는 곳도 아니다. 민족 정통성에 뿌리 둔 군사학교로 나라의 안녕을 지키며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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