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코로 대륙횡단’ 교통사고에 좌절… “실패해보니 도전 안두려워”

대전=전남혁 기자 2023. 11. 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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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 공유’ 실험]
KAIST ‘망한 과제’ 자랑대회
암 연구하다 암 진단 받았지만… “병 탓 도망 안돼” 복귀 사연도
실패 사례 선후배-동료와 공유… 위로와 용기 얻고 응원의 박수
1일 대전 KAIST 본원에서 열린 ‘망한 과제 자랑대회’에서 박정수 씨(25·기계공학과 석사과정)가 자신의 ‘실패 경험담’을 발표하고 있다. 그는 티코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겠다는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중 사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망한 과제 자랑대회가 펼쳐진 무대 뒤에서는 학생들이 실패를 겪은 순간들을 포착한 사진과 그 설명을 담은 사진전이 열렸다. KAIST 제공
KAIST 기술경영학부 황지웅 씨(21)는 첫 코딩 과제에서 ‘0점’을 받았다. 과제 제출을 미루거나 놀다가 ‘백지’를 낸 건 아니었다. 2주간 거의 쉬지 않고 어려운 개념들은 동료들과 토론을 거듭하며 열 문제 중 아홉 문제를 풀어냈다. ‘해냈다’는 뿌듯함과 ‘한 문제는 결국 못 풀었다’는 우울감 탓일까. 과제 제출 전 최종 확인을 거치지 않아 잘못된 코드를 입력하는 바람에 ‘0점’ 처리됐다. “실패를 하더라도 안 좋게만 생각하지 않고 배울 건 배우려고 합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이런 점을 공유하고 공감을 얻어보고 싶었어요.”

1일 오후 8시경, 황 씨는 대전 KAIST 창의학습관 로비에서 진행된 ‘망한 과제 자랑대회’에서 자신의 실패 경험담을 풀어 나갔다. 이 행사는 KAIST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이 인생 과제에서 자신의 실패담을 공유하고 나누는 자리로 올해 처음 마련됐다. 성공과 성취만 있을 것 같았던 국내 과학 수재들의 ‘실패 스토리’에 청중은 응원과 위로의 박수를 보냈다.

● “큰 실패 했더니 더 이상 도전이 두렵지 않다”

‘망한 과제 자랑대회’였지만 인생의 역경과 고난을 이겨낸 사연도 많았다. 기계공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박정수 씨(25)는 계획은 창대했지만 예상치 못한 사고에 이루지 못한 도전기를 공유했다. 계속되는 과제와 프로젝트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던 20세의 박 씨는 유라시아 대륙 횡단에 나서기로 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아닌 경차 ‘티코’를 타고서.

자동차 제작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박 씨는 주변 친구들을 모아 프로젝트를 준비했다. 직접 차를 구매해 필요한 부분은 스스로 정비하기로 했다. 1만3000km 정도 되는 거리니까 하루에 500km씩 달리면 한 달 안에 횡단할 수 있다는 계획을 세웠다. 인스타그램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 계획을 공유하자 지인뿐 아니라 전혀 모르는 이들까지 도움을 줬다. 차를 두 대나 기증받을 정도였다.

그렇게 준비하던 도중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가 났다. 함께 횡단하기로 했던 동료는 전치 2주, 박 씨는 전치 6주의 부상을 입었다. 티코를 타고 시베리아를 건너자는 계획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 “이렇게 큰 실패를 겪다 보니 도전이 두려워지지 않더라고요. 지금은 대학원생인데, 연구라는 게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잖아요. ‘과거에 이런 실패도 있었는데 이 정도는 괜찮지’라고 되뇌며 잘 이겨내고 있습니다.”

박 씨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에 차를 한 대 더 샀어요. ‘프린스’라는 차예요. 이 차도 고치고 있습니다. 내년이나 내후년쯤에 시베리아로 갈 거예요.”

KAIST 생명과학과 문진우 씨(30)는 김미영 교수의 ‘암 전이 및 후생유전학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가 맡았던 주제는 ‘폐암의 뇌 전이’였다. 연구를 한 지 2년째인 2018년, 우뇌에 1cm 혈관종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뇌종양이었다. 암을 연구하다가 암 진단을 받게 된 것. “수술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에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은 8시간이나 계속됐고, 성공적으로 끝났다.

‘살아남았다’는 기쁨 뒤에 닥친 건 두려움이었다. “머리에 5cm짜리 수술 자국을 안고 처음 든 생각은 ‘뭐 해먹고 살지?’였어요. 25세라는 나이에 ‘뇌질환 환자’가 돼버린 거잖아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그는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그리고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는 짧은 재활 후 연구실로 복귀했다. ‘병 탓을 하며 도망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마음에 연구에 다시 매진했다. 그는 지난달 말 박사과정 디펜스(학위 후보자가 심사자들과 질의응답을 거쳐 심사를 받는 과정)에 성공했다. “불합리한 조건도 있었고, 끔찍한 일이 많았는데요. 목숨줄 붙잡고 살아만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더라고요.”

● 실패 순간을 담은 사진전도 개최

KAIST는 지난달 23일부터 이달 3일까지 2주간을 ‘실패주간’으로 정했다. 실패를 혼자 품지 않고 후배, 선배, 동료와 나누는 과정에서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자는 의도다.

실패주간에는 실패를 겪은 순간들을 포착한 사진과 그 설명을 담은 메모 30여 점도 전시됐다. 미팅 1시간 전인데도 논문을 이해하지 못한 절망적인 순간, 숨 쉬듯 반복되는 코딩 에러, 대학원 일정이 끝나고 돌아가는 어두운 퇴근길에서 ‘성공으로 가는 길이 맞나’라는 되뇜…. 사진과 메모에는 학생들의 불안과 고민이 담겨 있었다.

경북 김천에서 초등학생 두 아들을 이끌고 사진전을 관람한 임영광 씨(46)는 “우리 애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에 와봤다”고 말했다.

암 극복기를 말했던 문진우 씨는 “한 학부모님은 생명과학에 관심이 많은 아픈 아들이 있는데, 제 경험을 듣고 정말 많은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며 “저는 실패를 공유했을 뿐인데 누군가는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는 점에 감사하다”고 했다.

대전=전남혁 기자 forwar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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