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의 우리문화 들배지기]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박서보가 죽었다. 마지막까지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고 했다. ‘그릴 만큼 그렸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림이라는 욕망을 끝까지 드러낸 것이다. 호이징거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즉 유희의 동물이라 했듯이 그림이라는 언어는 식욕, 성욕과 같이 인간의 본능에 해당한다. 그런데 문제는 평소 작가가 자기 그림을 늘 수행으로 일삼고 있었다는 점이다.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수행이라는 점에서 서로 상충된다. 이런 관념은 조선시대 도학자들이 완물상지(玩物喪志)라 하여 시서화를 억제한 데에서도 확인된다. 중세 1000여년간 신(神)의 이름으로 인간의 욕망을 억눌렀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미술은 욕망 해방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서구미술과 수행은 아무 관계가 없다.
이 점에서 박서보의 묘법은 서구미술을 수행으로 도약시켜낸 것으로 다가온다. 수행은 물(物)과 아(我)의 관계에서 언어를 통해 나를 돌아보는 무한대의 반복행위다. 여기서 언어는 몸, 소리, 말, 그림, 글씨 모두다. 물과 아를 다 비운 상태는 불가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유가의 심즉리(心卽理)는 물의 이치와 나의 본성을 같다고 본 입장이다. 자연의 법을 따르는 노장은 아예 물의 입장에서 인간을 본다.
박서보의 예술은 ‘텅 비움’이 화두다. 그런 만큼 ‘묘법(描法)’ 이면의 수행 궤적을 간파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묘법은 일제강점과 6·25전쟁과 함께 수입된 서구미술 광풍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시작되었고, 단색화를 통해 완성되었다. 실제 박서보는 동시대 작가 누구보다도 서구 미술 수용에 앞장섰다. 반국전선언(1956)과 함께 한국의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고, 1961년 추상표현주의를 재해석한 ‘원형질’ 시리즈와 1960년대 중반부터 미니멀리즘이나 모노크로롬페인팅과 같은 ‘유전질’ ‘허상’ 연작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그가 “노자, 장자를 읽고 또 읽었다”며 “나는 서양 이론에 의한 화가였지, 기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 대로 자신의 기존 작품세계를 비움의 ‘온몸 글씨 쓰기’ 즉 에크리튀르(Ecriture)로 전복시켜냈다. “다섯 살 난 둘째 아들이 종이가 구겨지고 제 맘대로 쓸 수 없으니 짜증을 내면서 연필로 죽죽 그어버리는 걸 보고, 아, 저거구나, 저 체념의 몸짓을 흉내 내 보고 싶었다”고 한 그대로다. 1967년 최초의 연필 묘법 ‘Ecriture No. 6-67’ 이후 50여년간 반복되었다. 그래서 그의 묘법은 그 자체가 묵언의 필획수행 과정에 방점이 찍힌다. 서구와 본질적으로 다른 모더니즘의 한국성을 각인시켜낸 것이 이 지점이다. 조형적으로는 붓 속에 칼을 잉태한, 그 자체가 푹푹 파인 밭고랑 같은 입체의 획(劃)/스트록에 있고, 정신적으로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사유다.
이우환과 윤형근이 다 같은 단색화로 묶이지만 여기서 그 지향은 다르다. 이우환이 점과 획의 관계, 즉 여백의 에너지/기(氣)를 문제 삼는다면, 윤형근의 획면(劃面) 추상은 고용함 속의 움직임 내지는 ‘결속이 있는 가운데 결속이 없음’(有結束中無結束)을 문제 삼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박서보의 무수한 반복 쓰기 이후 나타나는 직획의 푹 폭 파여 있는 미의 질서는 문장/텍스트로는 당연히 해독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장(禪杖)의 불립문자(不立文字) 사유와 같이 문자를 부정하면서 그 이전의 한 줄 한 획의 원초적인 온몸 언어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묘법은 서구미술의 서적(書的) 변상을 통해 서화분리시대로 각인된 20세기 한국미술에서 서와 미술을 혼일(混一)시켜낸 결정이 아닐 수 없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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