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 시인 윤기에게

기자 2023. 11. 2.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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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의 온 집이 모두 자고 있는데(萬戶千門盡寂然)/ 이따금 저 멀리서 들려오는 말소리(時聞人語在深邊)/ 부엌문 틈으로 등잔의 불빛이 비끼고(燈光斜透 廚扉隙)/ 술집에서는 새 술 거르고 죽집에서는 죽을 끓인다(酒肆新篘粥肆煎) - 윤기, <성중효경(城中曉景)>, 셋째 수에서

전기 조명 아래 누구나 한밤을 대낮처럼 지내게 된 지 이제 겨우 100년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해 떠 있는 동안을 알뜰살뜰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새벽과 아침의 의미가 오늘날과는 사뭇 달랐다. 조선 사람 윤기(1741~1826)가 그린 ‘성안의 새벽 풍경(城中曉景)’은 오전 4시 서울 도성의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서른세 번의 파루 종소리로 시작한다. 파루에 맞춰 술집과 죽집을 여는 사람들이야말로 도성의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었다.

술집과 죽집이 등불 아래서 분주한 가운데 “별이 하나둘 스러지고 몇 마리 닭이 울면(大星落落小 鷄鳴)/ 푸성귀장수 할멈이며 젓갈장수 늙은이가 다투어 도성으로 들어오(菜媼醢翁競入城)”고, “뒤이어 메기고 받는 나무꾼의 노랫소리(更有樵羣 相和聲)가 들려왔다.” 이고 진 짐꾼, 짐을 진 말이나 나귀를 부리는 짐꾼, 상인, 행인, 여행자와 주민이 얽히고설킨 가운데 서울 도성 동서남북의 길목에는 조시(朝市)가 섰다. 조시란 새벽에 여닫는 시장이다. 서울 사람들이 일용할 푸성귀·어물·젓갈·땔감 등이 날마다 조시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거래된 물건은 아침에 골목골목의 소매로 풀렸다. 서울 멋쟁이, 말하자면 ‘힙스터’ 무리도 도성의 일상에 맞추어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일상을 변주했다.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요즘 사람들은 일찍 일어나 흰죽 먹는 것을 조반(早飯)이라 하고 한낮에 실컷 먹는 것을 점심이라 한다”고 했다. 힙스터 무리란 먹는 데서부터 표가 나는 법이다. 한편 박종화(1901~1981)는 그의 소설 곳곳에 조시에서 끓여 파는 서울 술국의 모습을 남겨 놓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 해장국으로 유명한 서울 종로구 청진동이 돌아보인다.

청진동은 무악재를 넘어온 경기도 고양의 땔감, 백정의 공간인 서울 명륜동의 푸줏간에서 난 소고기·선지·내장·뼈, 서울 동대문 일대에서 기른 푸성귀가 집결해 조시가 서는 곳이었다. 애초에 술국 따위가 흥성할 만한 곳이었다. 현대에는 전혀 다른 맥락이 껴든다. 1960년대 정부는 관광산업 활성화를 부르짖었고, 관광호텔과 나이트클럽이 도심에 들어선다. 그때는 자정에서부터 오전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다. 나이트클럽을 찾은 사람들은 통행금지가 풀릴 때까지 밤새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놀았다. 이윽고 통행금지가 풀리면 해장국집으로 몰려가 속을 풀었다. 청진동 골목의 해장국만 해도 이만한 내력이 있다. 조선의 통행금지 해제 신호인 파루, 닭이 울기도 전에 분주한 술집과 죽집, 조시, 조시의 술국, 해방 뒤의 통행금지 및 그 해제, 오늘날의 도심 해장국집이 이런 연쇄를 이룬다. 이 연대기 자체가 이야깃감이다. 개연성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다시 태어날 만한 연대기다. 시인 윤기에게 먼저 고맙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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