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아르의 이름으로"...한-홍 영화 거장은 어떻게 런던에서 만났나
[SBS 연예뉴스 | 런던(영국)=김지혜 기자] "우리가 필름 누아르를 몽환적이라든가, 이상한 것이라든가, 에로틱하다든가, 모호하다, 또는 잔인한 것이라고 부른다면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다"
프랑스 비평가 레몽 보르드와 에티엔 촘톤은 "필름 누아르는 단순하게 정의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불어(Noir:검다)에서 유래한 단어에서부터 강렬함과 우아함이 느껴지는 이 장르는 미국과 프랑스, 영국을 거쳐 진화했고 아시아에서는 홍콩을 중심으로 일본, 한국으로 확산됐다.
영화는 시대와 나라와 사회를 어떤 식으로든 반영하기 나름이다. 장르의 태동과 진화 역시 동떨어질 수 없다. 홍콩과 한국에서 유독 '멋과 폼의 장르', '남성 범죄물'로 인식돼왔지만 거듭된 변화의 물결 속에서 동시대와 사회를 반영하는 장르로 진화했다.
현재 한국과 홍콩에서 누아르 장르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제작자 한재덕과 배우 겸 제작자 고천락(古天樂)이 지난달 29일 영국 런던에서 만났다. 런던아시아영화제(London East Asia Film Festival, 이하 LEAFF) 기간 중 열린 '누아르 토크' 행사를 통해서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존경을 아낌없이 드러냈으며 '누아르' 장르에 대한 각자의 견해와 애정을 피력했다.
한재덕 대표는 누아르 명가인 사나이픽처스의 수장으로 '신세계', '무뢰한', '아수라', '공작', '헌트', '화란' 등을 만들며 칸국제영화제 4회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영화인이다. 국내 최정상의 제작자가 특정 장르에 몰두하기 어려운 한국 영화계 환경 속에서 제작사 네이밍에 걸맞은 행보를 보이고 있다.
사나이픽처스 12번째 장편 영화인 '화란'은 지난 5월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섹션에 초청된 데 이어 런던아시아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돼 현지 관객과 만났다.
'화란'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소년 '연규'가 조직의 중간 보스 '치건'을 만나 위태로운 세계에 함께 하게 되며 펼쳐지는 이야기. 가상의 도시 '명안'을 배경으로 희망이 사라진 공간과 사람들의 지옥도를 그린 누아르 영화다.
고천락은 '마약전쟁', '흑사회', '엑시던트', '파라독스' 등에 출연한 배우이자 영화 제작사 원쿨 그룹을 이끌고 있는 홍콩의 특급 제작자다. 2000년대 초반 남다른 재능과 매력으로 홍콩 영화계 스타 자리에 오른 뒤 자신만의 영화 철학을 펼치며 영화계와 관객의 존경까지 받고 있다.
지난해 런던아시아영화제에서 '워리어스 오브 퓨처'(Warriors of Future)를 폐막작으로 선보인 바 있는 고천락은 올해 '바이탈 사인'(Vital Sign)으로 현지 관객과 만났다.
'바이탈 사인'은 사명감 높은 베테랑 구급요원으로 분한 고천락이 딸과의 이민을 고민하며 동시에 젊은 상사와 갈등하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 작품은 홍콩의 공무원 문화를 그리는 동시에 홍콩에 불어닥친 이민붐을 조명한다. 그러면서 남아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을 담았다. 홍콩 국민 배우의 신작을 런던에서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기회인 만큼 오데온 극장의 800석은 일찌감치 매진을 기록했다.
고천락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와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는 한국 영화에 대해 오랫동안 관심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졌다. 대담 하루 전 열린 '화란'의 런던 프리미어 상영회에도 직접 참석해 영화를 관람했다.
상영 전 포토월에서 만난 고천락은 "지금 홍콩을 비롯하여 글로벌 마켓에서 한국 영화에 대한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사나이픽처스의 전 작품들을 재미있게 봤기 때문에 '화란'의 영국 프리미어 상영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라면서 "누아르 장르라고 해서 기대가 많이 되고, 재능이 많은 한국 영화 프로듀서, 감독, 배우들과 협력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습니다"라고 사나이픽처스와 '화란'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대담에서 한재덕 대표는 자신의 영화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홍콩 누아르에 대한 아낌없는 헌사를 전했다. 한 대표는 "영화일을 하기 전부터 홍콩 누아르의 광팬이었습니다. 특히 두기봉(杜琪峰)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우상으로 생각했기에 그의 페르소나인 고천락을 만나는 이 자리가 무척 떨립니다"라고 운을 뗐다.
이날 대담에서 그는 "누아르 영화를 만들다가 죽는 게 제 꿈"이라며 "전 세계 모든 누아르 영화를 보려고 노력 중"이라고 장르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한재덕 대표는 왜 누아르라는 장르에 빠졌던 것일까. 그에게 따로 물었다. 한 대표는 "딱히 어떤 장르를 선호하거나 하던 것은 아니었는데 영화를 하다 보니 누아르 장르의 영화들을 좋아하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누아르 영화들이 주는 어떤 쓸쓸함, 허무 등의 감정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게 아닌가 싶네요. 특히 영화가 끝나고 난 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몰입한 거 같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감정과 느낌이 드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고, 원초적으로 제가 어느 정도 선까지 만들 수 있는 영화적 장르라고 생각됐습니다"라고 답했다.
누아르는 뛰어넘기 어려운 위대한 고전들과 클리셰를 답습한 아류물의 양산으로 인해 지금 가장 '핫한' 장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허무와 고독의 캐릭터, 뒷골목의 어둡고 쓸쓸한 정서는 이 장르만의 특별한 매력이다.
한재덕 대표는 누아르 한 우물을 파며 현재와 미래를 본다. 그가 도달하고 싶은 '한재덕표 누와르'란 어떤 형태일까 물었다.
"'한재덕표 누와르'라는 말 자체가 '제가 감히'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창한 말을 할 순 없지만 영화로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는 (좋은 의미의) 생채기를 내주고 싶단 생각을 합니다. 딱히 어떤 형태나 형식의 영화를 꿈꾸기보다는 관객과 언론이 모두 공감하는 근사한 누르를 만들고 싶습니다. 선배들의 영화들을 보면서 감동받고 흉내 내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만 저 역시도 누군가에게 그런 영화를 만들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고 행복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영화를 한편 한편 만드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힘든 일이지만 '한 우물이라도 제대로 파자'라는 생각입니다"
고천락이 지향하는 느와르는 어떤 것일까. 그는 "사회 문제를 반영하는 영화를 좋아합니다. 저는 영화가 (사회) 반영의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믿고 있습니다.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과 헌신은 제가 영화 제작사를 시작한 핵심 이유 중 하나입니다"라고 답했다.
두 제작자는 코로나19 이후 변화한 영화계 환경에도 빠르게 반응했다. 고천락이 지난해 선보인 '워리어스 오브 퓨처'는 그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워리어스 오브 퓨처'는 대기와 수자원이 오염된 도시의 절망적인 미래를 그린 SF 영화. 고천락은 이 작품을 통해 SF 장르에 대한 오랜 관심을 시각적으로 구현했고, 자신이 이끄는 회사의 역량을 집대성한 VFX 기술은 '탈아시아급'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지난해 8월 홍콩에서 개봉해 역대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고, 넷플릭스와 글로벌 배급 계약을 체결해 전 세계 관객과도 만났다. 고천락은 이날 대담에서 "홍콩 영화계에서는 미완의 영역인 SF 장르를 통해 미래 프로젝트를 확장시켜 나가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한재덕 대표 역시 시리즈물 '최악의 악'을 통해 OTT 플랫폼에 첫 발을 내디뎠다. 지난 9월 27일 디즈니 플러스에 런칭한 '최악의 악'은 공개 2주 만에 한국 1위를 찍었으며, 대만과 싱가포르에서도 1위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일본, 홍콩, 터키 등 현재까지 공개된 6개국에서 TOP10을 꾸준히 유지하며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세계 최대 규모의 콘텐츠 평점 사이트 IMDb 평점 8.6을 기록하며 올해 공개된 글로벌 OTT 오리지널 한국 시리즈 중 1위를 차지했다. '최악의 악'은 강렬하고 짙은 누아르의 색채 아래 섬세한 멜로를 가미해 사나이픽처스만의 개성을 살렸다.
두 사람 모두 누아르 장르에서 일가를 이룬 영화인이라는 점, 자신의 제작사를 통해 영화적 비전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또한 신예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 한국과 홍콩 영화계의 토양을 두텁게 하고 있다는 점도 닮았다.
이들의 만남이 한국도 홍콩도 아닌 영국에서 이뤄졌다는 것은 이례적이다. 두 영화인의 만남이 성사된 데는 런던아시아영화제 전혜정 집행위원장의 공이 컸다.
전 위원장은 지난해 영화제 폐막작이었던 '워리어스 오브 퓨처' 상영 및 행사 이후 고천락과 긴밀한 대화를 나눴다. 그러던 중 그가 한국과의 합작 프로젝트에 큰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올해 '화란'으로 영화제를 찾은 사나이픽처스 한재덕 대표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한재덕 대표는 이날 대담에서 "해외와 합작 프로젝트를 할 때 수월할 것 같은 장르가 누아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옆에 있는 분과 파트너를 맺으려 노력 중에 있습니다"라고 고천락의 러브콜에 긍정적 답변을 내놓았다.
이번 자리를 마련한 전혜정 위원장은 "누아르에 대한 담론을 넘어 한국과 홍콩 양국이 작품 협력을 약속하는 자리가 돼 관객의 큰 관심과 응원을 받았습니다. LEAFF는 영화제들이 선택하는 마켓 기능에서 한발 나아가 아시아 영화인들이 교류하고 소통하는 플랫폼을 구축해 상호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라고 전했다.
또한 "한국 영화 성장기에 해외에서 영화제를 만들어 처음으로 한국 영화를 소개한다는 사명감으로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간과 경험이 쌓여 나라간 영화계를 연결하고 미래를 도모하는 프로젝트를 이 곳 런던에서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은 제게도 특별한 보람입니다"라고 이번 기획의 의미를 부여했다.
전혜정 위원장에 따르면 두 사람은 한-홍 합작 프로젝트를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ebada@sbs.co.kr
<사진 =런던아시아영화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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