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입양과 돈]① 입양기관의 새빨간 거짓말과 피해자들
한국은 자국 아이를 해외로 가장 오래, 가장 많이 입양 보낸 국가다. 70년간 20만 명의 어린이가 고아나 버려진 아이 신분으로 다른 나라로 보내졌다. 서류조작 등 각종 불법과 인권침해 사례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해외입양이 거대한 이권 사업이었다는 의혹도 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해외입양 피해자와 수익자, 책임자를 찾고 구조적 문제를 규명하는 <해외입양과 돈>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편집자주]
①입양 기관의 새빨간 거짓말과 피해자들
②입양인들이 갈망하고 있는 '진실'
③입양 기관의 벽 너머 가려진 '엄마의 이름'
가난과 가족
인천 부평에 사는 박요한(61) 씨는 막냇동생이 태어나던 순간과 입양 기관에 동생을 맡기던 순간, 해외로 입양되는 동생을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안아보던 순간을 전부 기억하고 있다.
해외입양된 동생은 1975년에 태어났다. 당시 요한 씨는 1녀 3남의 맏아들이었다. 위로 누나 한 명과 아래로 남동생 두 명이 있었다. 어머니는 다섯 번째 아이를 가졌다. 요한 씨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당시 동대문구 창신동이라는 곳의 달동네에 살고 있었고요. 저는 중학교 1학년이었는데 중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할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만삭에 가까워져 올 때쯤, 조산원의 산파가 어머니에게 해외입양을 권유했던 것으로 요한 씨는 알고 있다.
“조산원 원장님, 산파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분인 거예요. 가난한 집에 젊은 여성이 만삭이 돼 가니까 어머니한테 접근했던 거로 저는 알고 있고요. 그래서 어머니에게 해외입양을 권유했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요한 씨의 어머니에게 입양 기관은 해외 입양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한국사회봉사회(입양 기관)에 A라는 분이 어머니와 비슷한 또래셨어요. (그분이 말하길) 해외입양이라는 건 국내입양과는 전혀 달라서, 이 아이가 해외에 간다고 해도 한국 부모들의 인적 사항을 다 그쪽 양부모들도 알게 되어있고, 아이도 성년이 되면 반드시 한국으로 찾아오게 연락들을 다 취해야 한다. 그러니까 아무런 염려하지 마라. 지금 당신들 가정은 너무 가난해서 아이를 잘 먹여 살리지도 못하고 잘 교육할 수도 없지만, 해외입양을 보내면 아이를 큰 인물로 건강하게 키워낼 수 있다. 아이는 스무 살이 넘으면 반드시 다시 찾아올 예정이니 아무런 걱정을 말라며 아이를 맡기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산통이 왔다. 아버지는 마침 지방 일로 집을 며칠 비울 때였다. 요한 씨가 어머니를 모시고 당시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조산원으로 갔다. 어머니는 여자아이를 낳았다. 가족들은 이 아이에게 ‘정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루 이틀 뒤, 입양 기관인 한국사회봉사회에서 엄마를 찾아왔다. 요한 씨는 출산 직후인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을 안고 어머니와 함께 한국사회봉사회로 갔다. 당시에는 버스로 1시간 정도 거리였다. 해외입양을 결심한 어머니를 따라, 요한 씨는 정란이를 한국사회봉사회에 맡겼다. 요한 씨의 어머니는 막내딸을 기관에 내주고 돌아오는 내내 눈물을 쏟았다.
“아버지가 뒤늦게 지방에서 돌아왔어요. 아버지가 ‘애 어디 있냐’고. ‘애 낳았으면 어디 있냐고’. 그러니까 엄마가 통곡하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집을 이틀간인가 나가셨던 기억이 저에게 있습니다.”
입양은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약 3개월 후, 입양 기관은 정란이가 네덜란드로 입양될 거라고 했다. 요한 씨는 어머니와 함께 공항에 가서 정란이를 배웅했다.
“마지막 김포공항 가는 날도, 제가 가서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안아보고 사진 찍고… 그때 당시에 (입양을) 소개해줬던 분이 이 아이는 네덜란드로 입양을 간다고 했었습니다. 그때 당시에 한 장 찍어놨던 사진을 어머니가 평생 간직하고 다니셨습니다.”
딸을 기다렸다
그렇게 십수 년이 흘렀다. 정란 씨가 잘 자라고 있다면 중학생쯤 될 때였다. 요한 씨는 어머니와 함께 입양 기관, 한국사회봉사회를 다시 찾았다.
“1989년이나 1990년이었을 거예요. 부모님이 이후에 미국에 이민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이민하시기 전에 제가 엄마를 모시고 한국사회봉사회를 방문했죠. (정란이한테서) 소식이 없느냐고… 그리고 입양 갔다는 아이들이 간혹 한국에 찾아오는 경우가 있기도 해서, 아이한테 연락이 없느냐고..."
그럴 때마다 입양 기관은 “아직 (아이에게서) 연락이 없다”고 말했다.
“때가 되면 찾아올 터이니 아무 염려하지 말아라. 지금까지는 아직 그쪽에서 (가족을) 찾지 않아서 소식이 없다. 그쪽에서 찾지 않으면 이쪽에서 먼저 찾아갈 수는 없는 거다, 그렇게 (입양 기관에서) 말씀을 하셨었죠. 그 이후 부모님이 미국에 이민 가신 이후에는 혼자서 매년 한 번씩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정란 씨의 소식을 도무지 들을 수가 없었다. 마침 어머니의 먼 친척 중에 딸을 네덜란드로 입양 보낸 사람이 있었다. 이 딸이 네덜란드의 가족과 함께 한국에 방문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그 먼 조카에게 ‘네덜란드에 가면 내 딸을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도 정란 씨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03년, 요한 씨는 어떤 신문에서 한 입양인의 소식을 접했다. 정란 씨가 살아있다면 이십 대 후반이 되던 해였다. 길지 않은 한 단락의 기사였다. 기사에는 "해외 입양인인 에바 호프만(Eva Hoffman)이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유전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으로 요한 씨는 기억하고 있다.
“작은 단락 기사였습니다. 사진도 없었어요. 그런데 기사에 이 학생이 ‘덴마크 출신’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아이는 네덜란드로 입양됐으니 이 아이는 아니겠구나. 하지만 이 아이처럼 훌륭하게 자라줬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죠.”
그 무렵, 정란 씨는 이미 스무 살을 훌쩍 지났을 터였다. 스무 살이 되면 돌아올 거라던 정란씨는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조차 없었다. 어느덧 정란 씨가 서른을 넘긴 시점이 됐다. 미국에서 한국을 방문한 요한 씨의 어머니가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했다. 요한 씨는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사회봉사회로 다시 갔다. 2006년이었다.
“2006년이면 아이가 서른이 넘은 때잖아요.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직관이 있었어요. 좀 얘기를 해달라. 진상을 알고 싶다는 거죠. 도대체 이게 어떤 일인지, 어떻게 지금까지 걔가 건강이 잘 있는지 아니면 잘 성장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것만이라도 좀 확인을 해달라.”
마침 당시 입양 기관에는 요한 씨의 대학 선배가 근무하고 있었다. 요한 씨의 청을 못 이긴 선배가 정란 씨의 입양 서류를 찾아봤다. 그 선배는 당시 요한 씨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말을 꺼냈다.
“ ‘야, (동생) 네덜란드에 안 갔는데?’ 그러는 거예요. ‘어디로 갔는데요?’ 물었더니 덴마크로 갔다는 거예요. 대경실색했죠. 아니 어떻게 네덜란드하고 덴마크하고 이렇게 달라져 버릴 수 있느냐고.”
놀랍게도 요한 씨가 신문에서 봤던 영국 옥스퍼드 대학 박사 에바 호프만은 요한 씨의 동생 정란 씨가 맞았다.
덴마크와 네덜란드
취재진은 지난 9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유전학 교수로 일하는 에바 호프만(48) 씨를 만났다.
생후 3개월에 덴마크로 입양된 정란 씨는 에바 호프만 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에바 씨는 평생 자신이 ‘고아’라고 생각하며 살았다고 했다. 자신의 공식 입양 서류에 그렇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저는 한국에 있는 가족을 찾지 않았습니다. 영어로 된 제 입양 서류에는 제가 고아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누군지 모른다고요. 덴마크에서 고아라는 것은, 부모님이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제가 (한국에) 가족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요한 씨 가족이 정란 씨가 네덜란드가 아닌 덴마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에바 씨에게도 연락이 닿았다. 에바 씨는 처음에는 입양 기관이 연락을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서른두 살 때 갑자기 연락을 받았어요. 한국에 있는 가족이 저를 찾고 있다는... 저는 덴마크 입양 기관에 전화해서, 연락을 잘못하신 것 같다고 했어요. 저는 고아이기 때문에요.”
에바 씨는 친가족과 처음에는 전화로 얘기를 나눴고, 이후 화상 전화를 통해 서로 얼굴을 봤다. 그리고 마침내 2008년, 미국 알래스카에서 살고 있던 친가족들을 만났다.
“저는 매우 충격을 받았고 매우 슬펐습니다. 내 가족들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슬펐어요.”
에바 씨와 친가족은 재회 이후 입양 기관의 거짓말을 하나씩 깨닫게 됐다. 에바 씨는 네덜란드로 입양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입양 기관이었던 한국사회봉사회는 딸을 애타게 찾는 요한 씨 가족에게 정란 씨가 네덜란드로 입양됐다고 수십 년 동안 거짓말했다.
서류에는 에바 씨가 고아라고 돼 있었다. 정란 씨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서류에는 정란 씨가 인천에서 태어났다고 적혀 있었다. 요한 씨 가족은 정란 씨를 바로 한국사회봉사회에 건넸지만, 서류는 정란 씨가 인천의 어느 보육원에 있었다고 돼 있었다. 서류에는 실제 정란 씨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가진 아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요한 씨 가족이 정란 씨가 사실은 덴마크로 입양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새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왜 덴마크로 간 애를 네덜란드로 갔다고 했느냐 그러니까 무슨 상관이냐고. 애만 잘 자라고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러면 얘 동생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어요. 정란이가 태어난 후에 연년생으로 남자아이가 태어났거든요. 그 아이를 저희 어머니는 정란이를 보낸 곳으로 같이 보낼 수 없겠느냐고 (입양 기관에) 간청을 했었어요. 당시 기관에서는 그 아이를 같은 곳(정란 씨 입양 양부모 가정)에서는 받지 않는다고, 그래서 미국으로 보냈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 아이가 국내에 입양됐다고 했어요. 아예 외국으로도 안 가고. 어머니가 거기에서 돌아오는 동안에 차 안에서 쓰러지셨어요. 중풍이 와서 얼굴이 이렇게 돌아갔고요.”
뒤늦게 알려진 바로는, 한국사회봉사회는 애초에 정란 씨의 덴마크 양부모에게 정란 씨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한국사회봉사회가 요한 씨의 가족에게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실제 정란 씨의 양부모는 정란 씨 이후 한 명의 한국 아이를 더 입양해, 정란 씨는 덴마크 가족 내에서도 동생이 있다. 정란 씨의 어머니는 2008년, 그토록 찾던 정란 씨를 만나고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해외 입양의 구조, 경제적 동기, 기관 및 정부의 책임, 잘못된 해외 입양 관행으로 누가 이익을 봤는지를 밝히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9월, 뉴스타파 취재진은 덴마크 코펜하겐을 방문했다. 덴마크는 공식 통계상 미국·프랑스·스웨덴 다음으로 한국 아동을 가장 많이 입양한 국가다. 덴마크의 한국인 입양인들은 해외 입양 진상 규명 그룹인 DKRG(Danish Korean Rights Group)를 구성해 활동 중이다. 뉴스타파는 현지에서 이들과 만나면서 서류가 조작된 또 다른 입양인을 인터뷰했다.
뒤바뀐 운명
“저는 임신 25주에 태어났어요. 하지만 저는 제 진짜 출생에 대해선 친가족을 찾기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친가족을 만나서 모든 거짓된 정보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미아 쇠렌센(Mia Lee Sørensen·36) 씨가 말했다. 그는 1987년 임신 25주 차에 미숙아로 태어났다. 하지만 미아 씨의 친가족은 30년 이상이 흐른 지난 2022년 미아 씨를 만나기 전까지, 미아 씨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다.
미아 씨의 어머니는 임신 25주 차에 갑작스러운 진통을 겪고 미아 씨를 출산했다. 출산 도중 어머니는 쓰러졌다가 깨어나 보니 조산원에서는 아이가 사산됐다고 했다.
다음 날, 미아 씨의 외할머니가 조산원을 다시 찾았다. 아이의 장례식이라도 치러주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조산원에서는 외할머니에게 화를 내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고, 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돌아가시라’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아 씨는 살아있었고,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입양 기관에 넘겨졌다. 미아 씨는 생후 6개월이 되던 때에 덴마크의 한 가정으로 입양됐다.
미아 씨의 입양 서류 역시 거짓으로 가득했다.
미아 씨가 임신 25주가 아니라 32주에 태어났다고 돼 있었다. 딸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를 몰랐던 미아 씨의 부모님이, 미아 씨의 입양에 찬성한 것으로 적혀 있었다. “미아 씨에게 좋은 양육 환경을 제공하기에는 아버지의 수입이 넉넉하지 않아 아이를 입양 보낸다”는 것이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미아 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9년의 교육만 받은 것으로 돼 있었지만, 이 또한 사실이 아니었다.
미아 씨는 한국의 친가족을 DNA 테스트를 통해 찾았다. 미아 씨 입양 기관은 한국사회봉사회였다. 미아 씨는 덴마크에서 성인이 된 후 친가족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한국사회봉사회는 미아 씨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미아 씨가 한국사회봉사회에 이메일을 보내 친가족을 찾아달라고 할 때마다 한국사회봉사회는 미아 씨의 가족을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한국사회봉사회에 의지하는 대신, 미아 씨는 DNA 테스트를 했고 뜻밖에 미국에 살고 있던 먼 친척과 연결이 됐다. 이들은 미아 씨가 한국에 있는 가족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지난 2022년 12월, 미아 씨는 드디어 한국에 있는 친가족들을 만났다.
“가족들은 유령이 나타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를 만났을 때, 그리고 제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가족들이 한 말이에요.” 미아 씨가 말했다.
“(입양 기관의 거짓말을 다 알게 된 후) 처음에는 너무 놀랐고, 동시에 친가족들이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어떻게 부모가 나를 포기할 수가 있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어요. 평생에 그런 생각을 했는데, 진실은 그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그들(한국의 친부모님) 역시 거짓말과 부패의 피해자였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한국사회봉사회는 미아 씨가 친가족과 재회하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에도 미아 씨에게 제대로 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입양 기관에서는) 이메일로 똑같은 말을 했어요. ‘우리는 몰랐다. 문서가 없고, 그때는 다 말로 전해진 것들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건 우리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한 것이다’라고요.”
미아 씨가 한국사회봉사회와 주고받은 이메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고아원과 출생 병원 기록에 귀하가 새 가정이 필요하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귀하의 친부모가 입양 문서에 서명했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현재 저희는 그 서류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한국사회봉사회가 미아 씨에게 보낸 이메일(2022.12.23.)
미아 씨의 덴마크 양부모는 당시 한국이 부패가 많았던 다른 나라들과 비교했을 때 입양을 잘 관리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에 한국 아동 입양을 결정했다고 했다.
하지만 미아 씨의 양아버지 벤트 한센 씨는 미아 씨가 겪은 일이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 미아 씨의 양어머니 릴리안 한센 씨는 “정말 잔인하다. 다른 많은 아이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정말 잔인하다.”고 말했다.
뉴스타파는 입양 알선 기관인 한국사회봉사회에 질의서를 보내 에바 씨와 미아 씨 사례에 대한 입장을 물었으나 한국사회봉사회는 “언론에는 답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아 씨는 “저는 진실이 알려지길 바랍니다. 모든 부패 이야기가 알려지길 바랍니다. 그리고 세계와 대중들이 한국에서 이런 일이 흔했고,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런 범죄를 저지른 사람 중 일부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들이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걸 알기 원합니다.”라고 말했다.
에바 씨도 취재진에게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에도 한국은 계속 아이들을 수출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해외 입양을 멈췄어야 할 시기에도 25만 명의 아이들을 해외로 보낸 겁니다. 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오늘 날의 한국 사회가 되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알고 있는,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이 우리를 돕기를 바랍니다.”라고 강조했다.
뉴스타파 강혜인 ccbb@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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