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입양과 돈]② 입양인들이 갈망하는 '진실'
한국은 자국 아이를 해외로 가장 오래, 가장 많이 입양 보낸 국가다. 70년간 20만 명의 어린이가 고아나 버려진 아이 신분으로 다른 나라로 보내졌다. 서류조작 등 각종 불법과 인권침해 사례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해외입양이 거대한 이권 사업이었다는 의혹도 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해외입양 피해자와 수익자, 책임자를 찾고 구조적 문제를 규명하는 <해외입양과 돈>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편집자주
①입양 기관의 새빨간 거짓말과 피해자들
②입양인들이갈망하는 '진실'
③입양 기관의 벽 너머 가려진 '엄마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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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입양인들의 삶에는 어떤 ‘공백’이 있다. 친부모가 누군지 모르거나, 정확한 생년월일을 모르거나, 태어난 곳을 모르거나, 어떻게 친부모와 떨어져 바다 건너 해외에서 새로운 가정을 만나게 됐는지를 모르거나.
어떤 해외 입양인들은 이런 공백을 굳이 채우려 하지 않고 입양된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은 입양인들도 있다. 문제는 이들이 그 공백을 채워가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두 개의 생일
미에 슐리히터(Mie Kim Schlichter·50) 씨는 생일이 두 개다. 하나는 2월에 있고, 다른 하나는 10월이다. 미에 씨의 입양 서류에는 원래 생일이 2월 25일로 돼 있다. 그러나 입양 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신체검사(Physical Examination)를 실시하고 생일을 10월 2일로 바꿨다. 미에 씨가 2월 생이라고 하기엔 “키가 작다(Short for Age)”라는 이유였다. 입양 기관은 아이의 발달 상태를 검사해 임의로 생일을 바꿨다.
그런데 자신의 입양 서류를 찬찬히 뜯어보던 미에 씨는 자신의 입양 서류에서 이상한 점들을 발견했다. 자신의 입양 서류가 한 아이의 것이 아니라, 두 아이의 것처럼 보였다.
한 서류에는 미에 씨가 1975년 2월 충현원 수용시설에 있다가 같은 해 4월에 충현원으로 옮겨지고, 이듬해인 1976년 5월에 홀트로 이동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해 10월에 충현원이 미에 씨의 양부모에게 쓴 편지를 보면, 미에 씨는 여전히 충현원에 있었다. 당시 충현원은 미에 씨의 양부모에게 “충현원에 있는 아이, 김미화 양(미에 씨의 입양 전 한국 이름)에게 비단 신발과 비단 가방, 크레파스를 사줬다”는 편지를 썼다.
미에 씨의 ‘키’와 관련된 정보도 이상했다. 1976년 11월 신체 검사상 미에 씨의 키는 82.5cm였다. 그런데 1976년 12월, 미에 씨의 덴마크행을 위해 발급된 여행 증명서(Travel Certificate)에는 미에 씨의 키가 87cm라고 되어있다. 한 달 만에 아이의 키가 5cm가 자란 것이다.
미에 씨는 취재진에게 자신의 입양 서류를 보여줬다. 실제 미에 씨의 입양 서류는 서로 모순이 많고 뒤죽박죽이었다. 예컨대 미에 씨의 생일이 2월에서 10월로 변경된 것은 1976년 6월 19일의 일이다. 그런데 시점상 더 앞인 6월 9일에 작성된 미에 씨의 초기 정보를 보면 미에 씨의 생일이 10월 2일로 기재되어 있는 식이다.
1976년에 태어나 1977년 5월 덴마크로 입양된 마이브릿 코에드(May-Britt Koed·47) 씨 역시 두 개의 생일을 갖고 있다. 하나는 10월, 또 하나는 12월이다.
마이브릿 씨의 수용자 대장에는 생일이 1976년 12월 3일로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다. 1977년 1월 14일에 작성된 이 문서에는 마이브릿 씨가 부산 최OO 씨의 집 앞에 유기되어 있었다고 적혀있다. 이후 홀트아동복지회로 가게 된 마이브릿 씨. 그런데 14일 뒤, 같은 해 1월 28일에 실시된 홀트의 신체 검사에서 마이브릿 씨의 생일은 10월로 기재되어 있다.
마이브릿 씨의 입양 서류에는 아이의 성별조차 엉망으로 기재되어 있다. 어떤 서류에는 마이브릿 씨가 ‘남성(Male)’으로 기재되어 있다. 성별이 남자(Male)로 되어있는 어떤 서류에는 누군가가 수기로 알파벳 ‘Fe’를 적어넣어 아이의 성별을 여자(Female)로 바꾼 흔적도 보인다.
마이브릿 씨가 한국의 입양 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와 덴마크의 입양 기관인 DIA(Danish International Adoption)에서 각각 받은 호적 등본과 의료 기록도 서로 달랐다. 왜 두 기관은 서로 다른 내용의 서류를 갖고 있는 건지 마이브릿 씨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두 명의 아기?
1976년에 태어나 이듬해 입양 기관 한국사회봉사회를 통해 덴마크로 입양된 한 남자 아기는 당시 몸무게가 2.6kg이었다. 당시 덴마크의 간호사는 아이를 보고 ‘덴마크 아기였으면 미숙아였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기는 ‘빨기 행동’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아이의 입양 전 의료 기록은 전혀 달랐다. 입양 전 서류에는 아기의 몸무게가 3.7kg, 그리고 “빠는 행동도 아주 잘 한다(He sucks very well)”고 되어있다.
입양 서류 사진 속 아기의 생김새도 달랐다. 사람의 귓불은 부착형과 분리형으로 나뉘는데, 입양 전 사진 속 아기는 분리형 귓불을 갖고 있다. 하지만 덴마크에 도착한 아기는 분리형이 아닌 부착형 귓불을 갖고 있었다.
“귓불은 유전적으로 결정되고,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는 해부학 의학 임상의에게 사진을 비교해달라고 했어요. 그는 한국사회봉사회가 보낸 사진 속 아기와 귓불 모양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덴마크 코펜하겐 대학교의 유전학 교수이자, 이 입양인의 양누나 이바 호프만 씨는 이렇게 말했다.
입양인들은 왜 이렇게 자신의 '뿌리'가 기재된 입양 서류의 내용이 뒤죽박죽이고, 심지어 다른 아이의 정보가 뒤섞인 것처럼 보이는지 알 길이 없다.
“짐작만 할 수 있겠죠. 만약 덴마크로 입양되려고 했던 아이가 죽었다고 해봅시다. 입양 기관은 어떻게 할까요? 입양 수수료를 이미 받았다고 하면 그 수수료를 양부모에게 다시 돌려줄까요? ‘귀하께서 입양하려고 했던 아이가 죽었다’고 사실대로 말하면서요? 아니면 정확한 생년월일이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몇달 차이라고 하면 비슷하게 생긴 다른 아이를 찾았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마이브릿 씨가 말했다.
뉴스타파는 홀트아동복지회와 한국사회봉사회에 해외 입양인들의 서류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적혀있는 이유 등을 물었다. 홀트아동복지회는 “담당자가 없어서 모른다.”라고 답변했다. 한국사회봉사회는 “언론에 답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기본적인 요구
뒤죽박죽인 입양 서류들은 입양인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해외 입양은 1960년대 후반부터 증가해 1980년대에 정점을 찍었다. 입양 기관들은 이 시기, 경쟁적으로 해외입양 사업에 뛰어들었다. 입양 기관은 아이를 보낼 때마다 수수료를 받았다. 국가기록원에서 관리하고 있는 ‘1978-1988 보건복지부 입양사업지침’에 따르면, 1982년 당시 정부는 입양 기관의 수수료를 노린 ‘인신 매매’ 가능성이나 ‘폭리 추구’ 등을 우려했다.
해외 입양 서류 자체에 많은 문제가 발견되자 덴마크 한국 입양인 그룹(DKRG. Danish Korean Rights Group)은 지난해 하반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조사를 요청했다. 이들은 1970~1980년대 입양의 불법성 여부, 서류 조작 여부 등을 조사해달라고 요구했다. 진실화해위는 지난해 12월 해외 입양 조사를 개시, 현재 조사를 진행 중이다.
“입양은 신발 한 켤레를 사는 게 아니잖아요. 지켜야 할 규칙들이 있을 거고요. 저는 제가 언제 태어났는지를 알고 싶어요. 내가 언제 태어났는지 아는 것은 기본적인 인권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입양되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지도 알고 싶어요. 정말 기본적인 것들이에요.” 마이브릿 씨가 말했다.
뉴스타파 강혜인 ccbb@newstap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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