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4.광명 충현박물관

경기일보 2023. 11. 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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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시 오리로에 위치한 충현박물관은 이원익과 직계 후손들의 유적·유물이 보존된 종가박물관으로 13대 종손이 설립한 충현문화재단이 건립하고, 2003년 10월 문을 열었다. 박물관 정문 모습. 윤원규기자

 

한옥의 멋은 담장에서부터 시작된다. 기와로 장식한 기다란 담장에 청사초롱을 닮은 등이 걸려 있다. 어두운 밤거리를 밝혀줄 따스한 불빛을 상상하며 대문을 열자 아늑한 풍경이 펼쳐진다. 광명시 오리로 347번길 5-6의 충현박물관 정원은 궁궐의 후원처럼 아름답다. 2003년 개관한 충현박물관(관장 함금자)은 조선의 명재상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1547~1634)의 생애와 직계 후손들의 유물과 유적, 종가의 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 ‘오리 정승’ 이원익의 영정에 담긴 사연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은 조선 중기 대표적인 문신으로 선조부터 인조까지 3대에 걸쳐 다섯 차례 영의정을 지냈다. 보물 1435호인 호성공신도 상 이원익 영정. 윤원규기자

다듬잇돌이 가득한 계단을 오르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박물관 입구에 전시한 이원익의 생애와 업적, 이원익 종가의 역사와 가계도를 통해 충현박물관이 종가박물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리 정승’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원익은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대동법을 시행한 탁월한 경세가이자 대표적인 청백리다.

충현박물관에서 가장 귀중한 유물은 네 점의 이원익 초상화를 꼽을 수 있다. 이원익과 동시대의 인물인 서애 류성룡이나 충무공 이순신의 초상화가 단 한 점도 없는 점을 견줘 봐도 아주 특별한 일이다. 보물 제1435호로 지정된 ‘호성공신도상 이원익 영정’은 이원익이 58세가 되던 1604년 그려진 작품이다. 오사모를 쓰고 흉배가 달린 단령포의 대례복을 입고 두 손을 소매 안에 넣고 ‘곡교의’라는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공신도상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초모본 이원익 영정’과 영정을 담는 함까지 완벽하게 보존한 사실도 놀랍다. ‘평양 생사당 구장 영정’으로 불리는 ‘이원익 선생 영정’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된 것인데, 유물에 담긴 사연이 더욱 흥미롭다. 1595년 우의정에 제수돼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 도체찰사로 떠나자 평양 감영의 서리들이 생사당을 세우고 감사 이원익의 초상화를 그려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원익이 사람을 보내 사당을 허물고 수습해 온 영정이기 때문이다. ‘오리영우’에 모신 영정도 사연이 많다. 다산 정약용이 이원익의 영정을 모신 ‘오리영우’를 참배하고 이런 글을 남긴다. “이 한 사람으로 사직의 평안함과 위태로움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백성의 여유로움과 굶주림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외적의 진격과 퇴각이 달라졌고, 이 한 사람으로 윤리 도덕의 퇴보와 융성이 달라졌다.”

정약용이 목민관의 사표로 삼은 이원익의 친필도 여러 점 만날 수 있다. 경기도유형문화재 제230호 ‘이원익 유서’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 있을까. 1630년 84세에 손수 작성한 이 유서에는 후손들 간에 우애를 잃지 말 것, 항상 검소할 것, 자신의 장례를 풍수에 얽매이지 말고 간소하게 치를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이원익이 77세로 관직에서 물러나자 왕이 기로연에서 의자와 지팡이를 내려주고 연회에 참석한 빈객과 주고받은 축시와 연회 장면을 그린 시화첩 ‘계해사궤장연첩’도 경기도유형문화재다. 목민관으로서 유념해야 할 덕목을 제시한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 수약에게’라는 글이 마음을 울린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몸을 닦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공무에 충실하다가 소홀히 한 일도 없지 않았다. ‘도망시(悼亡詩)’를 나직이 소리 내어 읽으면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 영일 정씨를 그리워하는 남편 이원익의 슬픈 얼굴이 그려질 듯하다. 이순신의 유고 및 관련 기록을 모은 ‘충무공가승’에 두 사람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는 글이 실려 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직속상관인 도체찰사 이원익에게 어머니를 찾아뵐 수 있도록 휴가를 허락해 달라고 보낸 청탁 편지는 심금을 울리는 명문이다. 이원익이 존경했던 류성룡의 ‘징비록’을 번역한 한글본도 희귀한 유물이다. 이원익이 손녀에게 써 준 정몽주의 시를 새긴 두 점의 목판에서 이원익을 향한 후손들의 존경심이 느껴진다.

전시관인 충현관에는 이원익 관련 유물 및 자료와 종가의 민속생활품등이 전시돼 있다. 전시장 전경. 윤원규기자

■ 종부로 이어온 이원익의 정신

관감당(觀感堂) 편액, 오리영우 편액과 열쇠패도 이원익의 위대한 생애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이원익의 후손들이 과거에 급제한 사실을 보여주는 백패와 홍패,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던 향로와 향합에서 가문의 긍지가 느껴진다. 1층 전시실로 내려가는 계단에 부착된 글과 사진을 통해 ‘종가에서 박물관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400년 긴 세월을 이어온 이원익 종가의 유물로 채워진 전시실의 배치가 아기자기하다.

장죽으로 불리던 기다란 담뱃대와 푸른 녹이 슬어 더욱 정겨운 방짜 놋요강, 한겨울 방안을 덥혀 주던 화로, 떡과 다식의 모양을 멋스럽게 만드는 떡살과 다식판, 떡을 찌는 떡시루가 놓여 있다. 물건을 담는 버들고리, 다림질에 쓰이던 인두와 옷을 지을 때 사용한 가위와 자까지 조선 양반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유물이 가득하다.

숟가락 하나까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정리해온 종부의 정성과 노력으로 만나게 된 유물이다. ‘오리 정승’의 정신을 잇는 후손들의 노력은 13대 종손 이승규 박사와 종부 함금자 관장까지 이어져 ‘최초의 종가박물관’인 충현박물관이 탄생할 수 있었다. 박물관 마당을 지나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0호인 종택에 들어선다.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문간채가 마당을 끼고 ‘ㅁ’자형으로 배치돼 있다. 1917년 건립된 안채는 13칸 반 규모의 소로수장집이다. 건넌방과 대청 및 안방, 부엌과 온돌방이 연결된 20세기 초반에 건립된 경기지역 살림집의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방과 부엌과 대청마루에 반상 및 장롱, 뒤주와 절구 같은 생활유물이 전시돼 있다.

광명시 오리로에 위치한 충현박물관은 이원익과 직계 후손들의 유적·유물이 보존된 종가박물관으로 13대 종손이 설립한 충현문화재단이 건립하고, 2003년 10월 문을 열었다. 윤원규기자

■ 관감당, 고위 공무원들이 반드시 찾아야 할 집

‘보고 느끼는 집’이란 뜻을 지닌 5칸의 한옥 관감당(觀感堂)을 소개한 안내판을 살펴본다. 1631년 1월, 인조가 승지를 보내 이원익을 문안하도록 한다.

“두 칸 초가가 겨우 무릎을 들일 수 있는데 낮고 좁아서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무너지고 허술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합니다.”

승지의 보고를 들은 인조는 “이공의 청렴하고 간결함은 모든 관료가 스승 삼아 본받을 바다”라며 5칸짜리 집 한 채를 지어 하사한다. 하지만 이원익은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라며 받기를 사양한다. 거듭 사양 끝에 받은 집이 바로 ‘관감당’이다.

400년 수령의 측백나무와 이원익이 앉아 거문고를 연주했다는 ‘탄금암’에 앉아 관감당을 바라보며 이원익의 생애를 더듬는다. 종택과 관감당 사이로 난 길을 통과하면 이원익을 추모하는 사당 ‘오리영우’가 있다. 영정을 살피며 실록에 기록된 그의 모습을 그려본다.

“이원익은 스스로의 몸가짐을 청렴하고 간소하게 해 하루에 먹는 음식이 몇 가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민폐를 살피고 무비(武備)를 잘 닦았기 때문에 비록 전쟁을 겪었어도 백성들의 마음이 흩어지지 않았다.”

정탁과 함께 죽음의 위기에 처한 이순신을 끝까지 변호해 살려낸 사람도 이원익이다. 1634년 정월, 향년 88세로 서거하자 사관은 그의 생애를 이렇게 추모했다. “…원익이 늙어서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바로 치사하고 금천(광명시 소하동)에 돌아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에 살면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혼자 지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

오는 30일까지 열리는 ‘여성생활사 특별전-충현박물관 소장 가구전’은 조선 시대 종가의 모습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기획이다. 충현박물관에서 가까운 동산에 이원익의 신도비와 묘소가 있다. 그 곁에 광명시가 세운 오리서원은 공직자들의 청렴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나는 이익을 보면 치욕을 생각했다.” 오리 이원익이 말년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들려준 말이다. ‘견리사치(見利思恥)’라는 오리의 말씀을 이 시대의 공무원들, 특히 장차관급의 고위공직자들이 기억하면 좋겠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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