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입양과 돈]③ 입양 기관의 벽 너머 가려진 '엄마의 이름'
한국은 자국 아이를 해외로 가장 오래, 가장 많이 입양 보낸 국가다. 70년간 20만 명의 어린이가 고아나 버려진 아이 신분으로 다른 나라로 보내졌다. 서류조작 등 각종 불법과 인권침해 사례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해외입양이 거대한 이권 사업이었다는 의혹도 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해외입양 피해자와 수익자, 책임자를 찾고 구조적 문제를 규명하는 <해외입양과 돈>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편집자주]
①입양 기관의 새빨간 거짓말과 피해자들
②입양인들이 갈망하고 있는 '진실'
③입양 기관의 벽 너머 가려진 '엄마의 이름'
엄마의 이름을 알지만, 알려드릴 수는 없습니다.
덴마크 한인 입양인 말레네 베스터고르(Malene Vestergaard·41) 씨가 “친가족을 찾고싶다”고 이야기 했을 때, 입양 기관이 한 답변이다.
말레네 씨는 1982년 12월에 태어났다. 생후 3개월이 됐을 때 덴마크로 입양됐다. 말레네 씨는 아기 때 한국을 떠난 뒤로는 41세가 될 때까지 한 번도 한국을 찾은 적이 없다.
지난 2월, 말레네 씨는 처음으로 입양 기관인 한국사회봉사회에 연락했다. 자신의 입양 관련 서류를 보고싶고 친가족을 찾고 싶다는 했다.
한 달 후, 한국사회봉사회에서 연락이 왔다. 말레네 씨의 요청에 따라 친부모 찾기 절차에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친아버지의 정보는 전혀 없기 때문에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사회봉사회는 이렇게 설명했다.
"귀하는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태평조산소를 통해 한국사회봉사회로 왔습니다. 조산소를 통해 우리가 받은 정보는, 귀하는 당시 27세였고 성이 이 씨인 한 미혼모의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친아버지와는 함께 살고 있었는데, 귀하께서 태어나기 2개월 전에 집을 떠났다고 합니다." - 한국사회봉사회가 말레네 씨에게 쓴 이메일
말레네 씨는 이 이메일을 보고 놀랐다. 말레네 씨는 그동안 자신이 거리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양부모가 해준 말이었다. 양부모는 덴마크의 입양 기관에게 그런 설명을 들었다고 했다.
말레네 씨는 한국사회봉사회에 친모의 ‘입양 동의서’를 보여달라고 했다. 친모가 자신을 입양 기관에 맡겼으면 자녀의 입양에 동의한다는 서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사회봉사회는 “친모의 동의서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입양 절차를 위한 것일 뿐 입양인들에게 공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말레네 씨의 친모를 찾는 것도 실패했다. 한국사회봉사회는 말레네 씨에게 이메일로 “(친모 찾기를) 성공하지 못했다. 지자체에서도 찾아봤지만, 친모에 대한 정보가 충분하지 않아서 찾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사회봉사회는 “당신의 친가족 찾기를 계속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므로, 죄송하지만 (친가족 찾기) 절차를 중단해야 한다”고 적었다.
벽을 직면하다
말레네 씨는 지난 10월, 입양된 후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한국사회봉사회에 직접 가서 친모의 정보와 자신의 입양 서류를 요청해볼 생각이었다. 직접 얼굴을 보고 요청하면 약간의 정보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입양 기관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사회봉사회는 “개인정보를 제외하고 이미 제공했던 입양 배경에 대한 정보가 전부”라고 말했다. 말레네 씨는 친모의 정보를 입양 기관이 알고 있었는데도 왜 자신의 입양 서류에는 아무런 가족에 대한 정보가 없이 자신이 ‘고아 호적’을 갖고 있었던 건지, 그리고 사실은 조산원에서 태어났던 자신이 왜 당초에는 입양 기관 밖의 거리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말레네 씨는 입양 기관을 방문한 뒤 눈물을 흘렸다. 그는 “어릴 때는 한국 입양 기관에 가면 그들이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도움을 많이 받지 못할 거라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우리 입양인들을 위해 이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직면하게 돼 너무 큰 실망”이라고 말했다.
말레네 씨는 입양 기관이 지구 반바퀴를 넘어, 자신과 닮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외딴 곳에서 평생을 살아가야 했던 입양인들의 삶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아이들이나 부모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을 빨리 입양 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요. 그래서 (아이과 관련된) 기록을 만들고, 돈을 좀 벌고요. 그게 다예요.” 말레네 씨가 말했다.
며칠 뒤, 말레네 씨는 해외입양인 지원 기관인 아동권리보장원을 찾았다. 해외 입양인은 입양 기관, 혹은 아동권리보장원에 친가족 찾기를 요청할 수 있다. 만약 입양인이 ‘미아’라면 아동권리보장원은 입양인이 경찰서에서 DNA 테스트를 받도록 도와줄 수도 있다. 누군가가 아이를 잃어버렸다면 경찰서에 아이를 찾기 위한 DNA를 등록했을 것이고, 만일 입양인의 DNA와 일치하는 DNA가 있다면 가족을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레네 씨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말레네 씨는 친모의 정보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미아는 아니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아동권리보장원은 말레네 씨가 미아라는 설명이 담긴 입양 문서가 필요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입양 기관과 아동권리보장원의 문을 모두 두드려 본 말레네 씨는 “벽에 부딪힌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도 덧붙였다.
35세의 미혼모
1975년에 덴마크로 입양된 요아킴 베른(Joakim Bern) 씨도 말레네 씨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요아킴 씨 역시 한국사회봉사회를 통해 덴마크로 왔다. 입양 서류에는 요아킴 씨가 부산 출생이라고 되어 있었다. 부산의 길거리에서 발견돼 부산의 남광보육원으로, 그리고 한국사회봉사회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요아킴 씨가 자신의 배경과 친가족 찾기를 시작했을 때 입양 기관인 한국사회봉사회는 요아킴 씨가 ‘서울 출생’이라고 말했다. 요아킴 씨는 부산의 남광보육원이라는 곳에서는 가본 적도 없었다.
요아킴 씨는 이 사실을, 44세가 되던 해에 처음으로 알았다. 44년 동안 자신의 배경에 대해 알고 있던 것이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 입양 기관은 친모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요아킴 씨는 충격을 받았다.
‘35세의 미혼모’. 하지만 이것이 요아킴 씨가 아는 친모에 대한 모든 것이었다. 입양 기관은 그밖에 어떤 정보도 요아킴 씨에게 주지 않았다. 한국의 개인정보법과 입양특례법에 따라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개인정보를 타인에게 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해외 입양인들은 자신에 대한 극히 제한된 정보만을 알고 있다. 친부모의 정보, 정확한 생일, 친부모가 어떤 이유로 자신을 키우지 않기로 결정했는지, 자신이 어떻게 입양 기관에 보내진 건지, 입양인들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제한된 정보만을 가지고 입양인들은 평생을 살아가기에, 누군가가 볼 때는 사소한 정보라고 해도 입양인들에게는 삶을 바꿀 정도의 큰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남편은 자신이 아기일 때 그냥 길거리에서 발견된 게 아니라 조산원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았다면 삶이 많이 달랐을 것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아기의 좋은 환경을 위해 입양을 보내기로 한 것과, 길거리에 아이를 두고 가는 것은 너무도 다른 이야기니까요.” 요아킴 씨의 아내가 취재진에게 말했다.
자료의 소유권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1977년 덴마크로 입양된 마이브릿 코에드(May-Britt Koed·47) 씨는 그동안 여러 차례 홀트를 방문했다. 몇 번의 방문 끝에, 마이브릿 씨는 홀트가 자신과 관련된 자료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09년 한국을 여행 중이던 마이브릿 씨는 처음 충동적으로 홀트에 방문했다. 친가족을 찾겠다는 생각도, 정체성을 찾겠다는 생각도 없었던 마이브릿 씨에게 홀트는 “친가족을 찾으러 왔냐”라고 물었다. 뜻밖의 질문에 마이브릿 씨는 “정보가 있으면 보여달라”고 했다. 홀트는 마이브릿 씨 앞에서 여러 서류들을 뒤적거렸다.
그때 마이브릿 씨 눈에는 양아버지의 서명이 담긴 문서 하나가 들어왔다. 당시는 양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마이브릿 씨는 한국에서 양아버지의 흔적을 보게 된 것이 신기했다. 마이브릿 씨는 홀트 직원에게 “그 문서를 좀 보여달라. 우리 아버지의 서명을 보고 싶다. 그게 뭔지 좀 볼 수 없겠느냐”고 요청했다. 하지만 홀트 직원은 마이브릿 씨의 눈 앞에서 그 서류를 감췄다고 한다.
“(홀트에서)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 문서는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거기 때문에 저는 볼 수가 없다고요.” 마이브릿 씨가 말했다.
이후 마이브릿 씨는 한 두차례 더 홀트에 방문했다. 마이브릿 씨가 지난해 마지막으로 홀트를 다시 방문했을 때, 홀트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홀트에서는 제가 왜 다시 자료를 요구하는지 이해를 못했어요. 저보고 ‘여기 오신 적이 있지 않냐. 우리는 줄 거 다 줬다. 아무것도 없다. 당신은 고아라고 적혀있고, 배경 정보가 없다. 누구도 당신을 도와줄 수가 없다’ 그렇게 말했어요.” 마이브릿 씨가 말했다.
해외 입양인들의 정보 접근이 막히는 것은 특정 입양 기관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방이 막힌 벽
해외입양 관련 서류가 조작됐거나 신원이 바꿔치기 된 의혹 등이 잇따라 제기되면서 많은 해외입양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게 됐다. 입양인들은 의문을 해소하려고 했지만 입양기관은 비협조적이었다.
입양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된’ 정보였지만, 입양 기관은 보관하고 있는 입양 서류와 입양인 친가족 관련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고 있다. 입양 기관은 입양 서류가 ‘기관의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엔아동권리협약 8조는 “아이가 불법적으로 정체성의 일부 또는 전부를 박탈당한 경우 당사국은 아동이 신속하게 정체성을 재확립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국제 협약은 한국에서는 실효성이 없다.
한국의 입양특례법에 따르면 입양 기관 등은 입양 아동의 요청이 있을 때 친부모의 동의를 받아 정보를 공개해야 하지만, 친부모가 동의하지 않는 경우 인적 사항을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 친부모의 동의가 없어도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친부모가 사망했거나 입양인에게 의료상 목적 등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경우다. 이 조항은 입양인들의 뿌리 찾기에 실질적 도움이 되지 못한다.
뉴스타파는 홀트아동복지회와 한국사회봉사회에 해외 입양인들의 정체성 찾기를 어떻게 돕고 있는지, 많은 입양인들이 정체성 찾기에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는데 어떤 입장인지 등을 물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답변은 없었다. 홀트아동복지회는 “담당자가 없어서 모른다.”라고 답했고, 한국사회봉사회는 “언론에 답을 하지 않는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왜 입양 문서를 요구하는 입양인들이 자신들의 배경에 관한 자료를 받지 못하는 건가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배경과 뿌리를 알고,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입양인들의 정체성 찾기에 목소리를 내는 테레사 베르그 앤더슨(Theresa Berg Andersen) 덴마크 국회의원이 지적했다.
과거의 일, 현재의 일
해외입양은 종종 성공 신화로 나타나기도 하고, 누군가의 선의로 포장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해외 입양은 국가가 스스로 아이를 보살필 수 없다는 고백이다. 부모, 사회, 국가의 포기가 중첩된 공간에서 아이는 무연고의 세상으로 보내진다.
한국은 1970년대~1980년대에 이러한 해외 입양을 매우 신속하게 진행했다. 입양 기관은 아동을 인수한 뒤 신체 검사를 통해 ‘입양이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해외로 보냈다. 이렇게 해외로 가게 된 아이가 성인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한국에 돌아오면 입양 기관과 정부 기관, 그리고 한국의 법까지 입양인들의 요구를 사실상 외면하는 게 현실이다.
“해외 입양은 이미 과거에 지난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해외 입양은 과거에 일어난 일이지만, 저희들에게는 매일 일어나는 현재의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제대로 된 배경을 몰라요. 매년 생일이 돌아오지만 우리 입양인들은 진짜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르잖아요. 과거에 일어난 일이 매일 우리에게 영향을 줍니다. 절대로 떠나지 않아요.”
덴마크 한인 입양인이자 해외 입양 진상 규명 그룹인 DKRG(Danish Korean Rights Group)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이네 마이달(Jane Mejdahl) 씨가 말했다.
“입양인을 볼 때 잘사는 나라에 가서 좋은 삶을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곤 하죠. 그런데 입양인들은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해요. 저희는 인종 차별을 경험했고, 사회에서 겪은 갈등으로 인해 심리적 문제를 호소하기도 합니다. (입양인들은) 매우 취약한 집단인 거죠. 한국분들이 ‘그래도 한국에서 사는 것보단 거기서 훨씬 더 나은 삶을 살았잖아’라고 말씀하시는 걸 듣기도 하는데, 글쎄요. 한국에서 가난하게 살았어도 가족의 사랑은 받았겠죠. 그건 그리 나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마이브릿 씨가 말했다.
뉴스타파 강혜인 ccbb@newstapa.org
Copyright © 뉴스타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