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더 지어야 집값·월세 잡는다”… 英·美서 번지는 ‘임비’

성유진 기자 2023. 11. 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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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Cover Story] 주택 공급 늘리자는 선진국들의 초당파적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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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의균

“물론이죠. 저는 ‘임비’입니다.”

영국 제1 야당인 노동당의 키어 스타머 대표가 지난달 BBC에 출연해 “당신은 임비냐”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선언했다. 임비(YIMBY·yes in my backyard)는 특정 시설 건립을 반대하는 ‘님비(NIMBY·not in my backyard)’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우리 동네에 더 많은 집을 지어달라’고 요청하는 움직임을 말한다. 스타머 대표는 “미래를 위한 주택 건설은 주거 사다리에 오르고 싶어하는 젊은이에게 엄청나게,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했다.

노동당은 1년 넘게 여론조사에서 집권 여당인 보수당에 큰 차이로 앞서고 있다. 이대로라면 내년 말 치를 것으로 예상되는 총선에서 승리하고, 스타머 대표는 영국 총리가 된다. 그러면 노동당에 의한 대규모 주택 공급이 현실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노동당은 5년간 150만 가구를 추가로 짓겠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훼손된 채 방치된 일부 그린벨트에 집을 짓거나, 도심 브라운필드(이전에 개발됐지만 현재는 사용하지 않는 부지)를 고밀도 주택으로 쉽게 재개발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꾸겠다고 했다. 규제를 완화해 개발업자들이 새 집을 빠르고 쉽게 지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또 이렇게 지어진 새집을 살 수 있도록 생애 최초 주택 구입자에게 우선권을 주고 대출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영국 런던 하원에서 연설 중인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 그는 최근 "당신은 '임비(YIMBY)'냐"는 질문을 받고 "그렇다"고 답했다. /로이터 연합뉴스

이런 규제 완화를 통한 대규모 개발과 주택 확대 약속이 중도 좌파 성향인 노동당의 정책이라는 점에서 예전과 다른 파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임 제러미 코빈 대표 시절까지만 해도 노동당은 재정을 투입해 공공 임대주택을 확대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지만, 이제는 공공 임대주택과 함께 민간 주택도 모두 함께 늘리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주택 공급을 늘려 집값과 월세 폭등을 해소해야 한다는 ‘임비’ 운동이 영미권을 중심으로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특히, 공공 임대주택 확대에 주로 목소리를 키우던 영미권 좌파 정치인들도 이제는 공급을 가로막는 규제를 없애 집을 많이 짓자며 도심 개발에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런 변화를 발판으로 임비 운동이 강한 탄력을 받고 있다.

그래픽=김현국

시드니부터 캘리포니아까지 임비

호주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는 저스틴 시몬(36)은 지난 4월 ‘시드니 임비’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곰팡이 낀 열악한 임대주택에 살았던 저스틴은 집을 사기 위해 시드니를 떠나야 했던 친구들을 보며 주택 공급 확대가 절실하다고 느꼈다. 그는 주로 2030세대인 시드니 임비 회원들과 함께 새로운 주택 개발을 지지하는 제안서를 제출하고, 시 의회 공청회에 참석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런 풀뿌리 임비 단체는 시드니뿐 아니라 미국 캘리포니아, 영국 런던, 스웨덴 스톡홀름, 캐나다 토론토에도 생겼다. 주로 집값이 비싸고 주택 공급이 더딘 지역들이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에 따르면 미국에서 주택 공급을 주장하는 단체가 140개가 넘는다. 대부분 2016년 이후 생긴 신생 단체로, 미국 100대 대도시 가운데 45개 도시에 적어도 하나의 단체가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주·매사추세츠주처럼 집값이 상대적으로 비싼 지역일수록 더 많은 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주택 공급 옹호 단체 '시드니 임비'(위)와 '캘리포니아 임비'(아래) 홈페이지 화면.

임비 운동은 초당파적이다. 우파부터 좌파까지 다양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이들이 모여 있다. 폴 루이스 애리조나주립대 교수는 “임비 운동 한편에는 도시·교외의 부유한 지역을 (저소득층·청년·유색인종 같은) 소외된 집단에 개방하고 싶어하는 좌파 임비가 있고, 또 다른 쪽에는 규제를 비판하며 민간 주택업체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우파 임비가 있다”고 했다.

좌파들도 임비에 적극적인 건 주택 개발이 환경을 해친다는 기존 인식에서 탈피했기 때문이다. 고밀도로 개발해 주거용 건물의 층수를 높여야 같은 인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면적이 줄어 자연을 덜 훼손하고, 대중교통 시스템을 확충하기도 쉽다는 것이다. ‘스톡홀름 임비’는 “밀집된 도시에선 (장거리 통근이 줄어) 자동차를 덜 타기 때문에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고, ‘캘리포니아 임비’는 “다세대 주택보다 단독 주택이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래픽=김의균

좌파 정치인도 “어떤 집이든 짓자”

영미권에서는 좌파 성향 정치 리더들이 임비에 적극적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개빈 뉴섬 주지사(민주당)는 2019년 취임 이후 상업용 건물을 주거용 건물로 쉽게 개조할 수 있도록 했고, 좁은 부지에도 아파트를 지을 수 있도록 계단 설치 의무 개수를 줄이는 방안도 준비 중이다. 역시 민주당 소속인 캐시 호컬 뉴욕 주지사도 올 초 시정연설에서 “사람들은 이곳에 살면서 이곳에서 일자리를 갖고 싶어한다”며 “앞으로 10년 간 80만 채의 신규 주택을 건설하겠다”고 했다. 호컬 주지사는 지하철역 근처에 중층 건물을 허용해 더 많은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하겠다고 했다. 민주당이 임비에 적극적인 건 비싼 집값·월세로 고통받고 있는 젊은 층·무주택자가 주요 지지 기반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성향인 티파니 카반 뉴욕 시의원은 작년 9월 당시 자신의 지역구에서 1300가구 이상의 아파트를 짓는 프로젝트에 찬성표를 던졌다. 1300가구 중 4분의 1은 저소득층에 시세보다 낮은 임대료로, 4분의 3은 일반 가구에 시장 가격으로 공급된다. 카반 의원은 “나는 공공주택 건설을 선호하지만 ‘모든 주택이 저렴하거나 혹은 아무것도 짓지 않거나’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라고 했다. 민간 부동산 업체가 집을 더 짓도록 유도하려면 어느 정도 이익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타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수년 동안 뉴욕의 선출직 공무원은 부동산 개발업자라는 공동의 적을 공격해 점수를 얻어왔지만, 주택 부족 위기가 이제는 일부 진보주의자의 정치적 계산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그래픽=김현국

극심한 주택난을 겪고 있는 호주에선 집권 여당인 중도 좌파 노동당이 지난 8월 ‘5년 동안 120만 가구를 신규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앤서니 앨버니지 총리는 주택 건설 목표치를 초과 달성하는 주정부에 인센티브를 주고, 기존 대중교통과 가까워 입지가 좋은 지역에는 중·고밀도 주택 건설을 장려하기로 했다. 앨버니지 총리는 “공급 확대는 월세를 낮추고 세입자를 돕는 열쇠”라고 말했다.

캐나다에선 야당인 보수당을 이끄는 피에르 폴리에브 대표가 지난 9월 집을 많이 짓는 지역에 연방 교부금을 늘리고 그렇지 않은 지역에선 회수하는 방식으로 주택 공급을 촉진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폴리에브 대표는 밴쿠버 환승역 인근 공터에서 이 같은 계획을 발표하며 “이런 곳에서 고층 (주거용) 건물이 하늘을 수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거용 건물의 층수를 올려라

임비 운동이 영미권에서 활발한 이유 중 하나는 고밀도 개발의 필요성에 공감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기 때문이다. 고층 아파트가 많은 동아시아와 달리 영미권은 1~2층짜리 단독주택이 많아 도시 밀도가 낮다. 특정 지역에 건설 가능한 주택 종류를 제한하는 구역 규제(zoning)가 주택 공급을 가로막은 탓이다. 이에 따라 임비 운동가들은 용도 상향(upzoning)을 하는 방향으로 규제를 풀어 층수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미국·영국·호주처럼 단독주택이 많은 나라에서 주택 공급이 더디다. 짐 글리슨 런던광역당국(GLA) 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2000년에서 2020년 사이에 영국에서는 인구 100명당 주택 수가 43채에서 44채로 소폭 증가하는 데 그쳤다. 같은 기간 미국 역시 41채에서 42채로, 호주도 40채에서 41채로 증가량이 미미했다. 반면 일본은 42채에서 49채로 상대적으로 큰 폭으로 증가했다. 시드니 임비의 20대 회원인 샤라스 마헨드라는 로이터통신에 “내 또래의 젊은 호주인은 넓은 뒷마당을 갖춘 단독주택이 아닌 지하철역 옆의 아파트를 원한다”고 했다.

그래픽=김현국

공급이 늘어야 월세가 덜 오른다는 연구 결과도 속속 나왔다. 비영리단체 ‘퓨자선기금’에 따르면, 2017년 이후 미국 전역에서 주택은 3% 늘어나고 월세가 31% 올랐지만, 이 기간 다세대주택을 짓도록 규제를 풀어 공급을 8~23% 늘린 미니애폴리스·뉴로셸·포틀랜드·타이슨스에선 월세가 1~7% 증가하는 데 그쳤다.

뉴질랜드 최대 도시 오클랜드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2016년 오클랜드는 주택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주거용 토지의 4분의 3을 용도 상향했다. 단독주택 구역은 줄이고, 최대 7층까지 아파트를 지을 수 있는 구역은 늘렸다. 그 결과 2016~2022년 사이 오클랜드 월세 상승률이 연평균 3%에 그친 반면, 수도 웰링턴의 월세는 연평균 7%씩 올랐다.

미국 세입자, 소득의 30% 월세로 지출

임비가 초당파적 지지를 받게 된 건 그만큼 선진국 주택 위기가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세인트루이스연방준비은행에 따르면 미국에서 매매된 주택의 평균 가격은 올해 3분기에 51만3400달러(약 7억원)로 20년 전(24만8100달러)의 두 배 이상이다. 같은 기간 영국의 평균 집값도 13만3000파운드에서 29만1000파운드(약 4억8000만원)로 올랐다. 뉴욕·런던 같은 대도시로 한정하면 집값 상승률은 훨씬 높다.

월세 폭등은 가히 살인적이다. 무디스 애널리스틱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기준 미국의 중위 소득 대비 월세 비율은 30.2%였다. 1000달러를 벌 때마다 302달러는 월세로 고스란히 빠져나간다는 얘기다. 무디스는 “소득의 30%를 월세로 지출하는 것이 대다수 미국 도시에서 ‘뉴 노멀’이 됐다”며 “임금 상승률이 주거비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주거 비용이 대폭 오르면 연쇄적으로 지역 경제가 타격을 입는다. 대출 이자를 갚거나 월세를 내는 지출이 늘어날수록 소비를 줄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연구단체 스마트번영연구소의 마이크 모팻 연구원은 CBC방송에 “주민들이 동네 식당·상점에서 쓰는 돈을 줄이면 자영업자들이 타격을 입고, 월세가 오르면 기업들이 직원을 붙잡기 위해 임금을 더 올려줘야 한다”고 했다. 주민들이 아예 다른 지역으로 떠나기도 한다. 올 초 캘리포니아공공정책연구소(PPIC)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4%가 ‘주택 비용 때문에 다른 주로 이사를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주택 공급을 늘리자는 이들은 ‘투기가 집값을 올린다’ 통념에 적극적으로 반박한다. 미국 주택연구기관 사이트라인연구소의 창립자인 앨런 더닝은 “투기는 집값이 오를 것이란 기대 때문에 이뤄지기 때문에 주택 공급은 오히려 이런 투기꾼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미국 임비 단체인 ‘임비 액션’은 “주택을 늘리면 더 많은 학생이 생겨 학교가 문을 닫는 일을 막을 수 있고, 동네 자영업자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며, 사람들은 자신이 자란 동네에서 계속 살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그래픽=김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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