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공예 디자이너' 이순석 [더 라이프이스트-성문 밖 첫 동네, 충정로 이야기]
20, 이명래와 이순석
지난 토요일 아내와 공세리 성당을 찾았다. 고색창연한 성당은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성당에서 이명래의 흔적을 찾지 못해 아쉬움이 있었다. 이명래와 이순석 선생의 표석이라도 세워 우리가 알아야 할 문화사를 후대에 남겼으면 하는 아쉬움에 글을 이어간다.
이명래는 1952년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경기도 평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한다. 창업자 사후, ‘이명래 고약’은 전통 비법 고수와 약의 대중화로 분화된다. 서울로 돌아오니 지금의 종근당빌딩 자리에 3층 건물로 있던 '명래 한의원'은 폭격으로 잿더미가 됐다. 이때 이명래가 가지고 있던 소중한 제약 자료들도 대부분 소실됐다. 가업은 이명래의 사위 이광재에게 넘어갔다. 이광재는 이명래선생이 첫 부인과의 사별 후 얻은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첫딸의 남편이다. 보성전문 출신인 이광재는 장인에게 물려받은 가업을 충정로역 뒤편, 지금의 자리에서 이어간다. 이광재에 이어 다시 가업을 이은 임재형도 이광재의 사위이다. 사위들이 가업을 이어가는 색다른 구조였다. 한편 이명래의 둘째 딸 이용재는 고약의 대중화를 위해 1956년 '명래제약'을 설립한다. 명래제약에서 판매한 고약을 80년대까지 전 국민이 사용했다. 명래제약은 관철동에 있었다. 이용재는 경성여의전(고려대 의대 전신)을 졸업한 의사로 신민당 총재와 고려대 총장을 지낸 ‘현민 유진오’의 아내다. 명래제약은 대량생산을 위한 설비투자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제 이명래(1890~1952) 선생의 동생 이순석의 이야기를 해보자. 하라 이순석(賀羅 李順石, 1905-1986)은 이명래의 막내 동생으로 이명래와는 15살 차이가 난다. 그 사이에 7명의 형과 누나가 있었다. 9남매라니…지금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생각해 보니 우리 어머니도 10남매 중 셋째였다. 예전에는 많이 낳아 키웠다. 아이를 낳고 그 다음 날 밭매러 나가던 시절이다.
맏형 이명래가 신부의 도움으로 종기와 부스럼 치료제의 제조법을 전수받았다면 막내 이순석은 신부의 도움으로 미술의 길로 들어선다. 드비즈 신부는 어릴 적부터 그림과 공예에 소질이 있는 이순석을 공부시켜 우리나라 최초의 공예 디자이너로 만든 것이다. 이명래는 큰 야망을 품고 서울행을 결심한다. 이곳에는 공세리 성당과 외형도 비슷한 중림동 약현성당이 있다. 서소문 밖 처형장은 내포 천주교 역사의 뿌리를 이루는 공세리 성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순석은 충정로에 터를 잡은 명래 한의원에서 일을 하며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순석은 1925년 동경미술학교 도안과에 입학한다. 동경미술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을 비롯, 김관호와 김찬영이 수학한 학교이다. 이순석은 졸업 후 서울에 돌아와 1932년 7월7일 경성부청(서울시청) 건너편 장곡천정(소공동) 105번지에 경성 모더니스트들의 모임 장소인 낙랑파라(樂浪parlour)를 개업한다. 이 다방은 프랑스의 ‘살롱’과 같이 문학과 미술을 논하는 예술인들의 아지트로 구인회와 목일회 멤버들의 단골집이었다.
대한문 앞으로 고색창연한 옛 궁궐을 끼고 조선호텔 있는 곳으로 오다가 장곡천정 초입에 양제 2층의 소서한 집 한 채가 있다. 입구에는 남양(南洋)에서 이식하여 온 듯이 녹취 흐르는 파초가 놓였고, 실내에 들어서면 대패밥과 백사(白沙)로 섞은 토질 마루 위에다가 슈베르트, 데도릿지(독일 여배우 마들레네 디트리히) 등의 예술가 사진을 걸었고, 좋은 데생도 알맞게 걸어 놓아 어쩐지 실내 실외가 혼연 조화되고 그리고 실내에 떠도는 기분이 손님에게 안온한 심정을 준다. 이것이 ‘낙랑파라’다. (박옥화, ‘인테리 청년 성공 직업’, 삼천리 1933년10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도 등장하는 낙랑파라의 단골손님이 바로 우리나라 문학사의 이단아 이상이다. 그는 종로에서 제비다방을 폐업하고 금홍이하고도 헤어진 뒤 이곳 출입이 잦았다. 이곳의 지배인은 변동욱이었다. 이상은 변동욱에게 자그마한 키에 지성미가 넘치는 여동생을 소개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시인 이상과 문학소녀 변동림의 만남은 시작됐다. 둘의 만남은 가히 변강쇠와 옹녀의 만남처럼 우리나라 문예사의 큰 지진이었다. 이화여전을 갓 졸업한 변동림이 나중에 김환기의 아내 김향안이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상은 변동림에게 ‘너 나랑 죽을래? 사귈래? 아니면 나랑 살래?’라고 청혼했고 몇 개월 뒤 정릉골짜기 흥천사에서 결혼했다. 이상은 금홍이와 헤어진 뒤 헛헛한 마음에 말이 통하는 모던걸 동림에게 끌렸고 변동림은 퇴폐적 우수에 가득 찬 이상의 분위기에 마음을 놓아버렸다. 그들의 만남을 제공한 낙랑파라, 그 다방의 주인이 이순석이니 그것만으로도 이순석은 우리의 일천한 문화사에 이름이 기억될만하다.
이순석이 일본에서 유학하고 큼지막한 다방을 개업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고약 판 돈 덕분일 것이다. 형이 고약을 판 돈으로 동생의 유학길을 열어주었고 마침내 서울 한복판에 최초의 다방을 개업한 것이다. 이순석은 다방을 유명 배우 김연실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중일전쟁 시기인 1939년부터 해방을 맞을 때까지 충정로에서 형의 사업을 돕는다.
이순석의 활약은 해방 이후부터이다. 국립종합대학교 내 미술대학안 구상(국대안)에 참여해 1946년 10월부터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도안과 및 응용미술과 교수를 지냈다. 우리나라 도안(디자인)의 선구자로서 그의 미술사적 업적은 대단하다. 한 예로 우리나라 최고의 훈장인 ‘무궁화 대훈장’도 그가 도안한 것이요, 입법 행정 사법부의 온갖 심벌마크와 휘장을 디자인한 것도 이순석이다.
1977년 여의도에 신축한 국회의사당 정문 안에 있는 해태상도 이순석선생의 작품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자문위원을 맡은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 선생님은 "의사당을 화재에서 예방하려면 해태상을 세워야 합니다. 전에 조선시대 경복궁이 화재로 전소된 뒤 복원공사 때 해태상을 세워 이후 화재를 예방한 바 있습니다. 그러니 의사당에도 해태상을 세우는 게 좋을 듯합니다."라고 주장했다.
해태상을 세우는데 당시의 예산 2천만 원은 해태를 회사의 심벌로 쓰고 있던 해태제과의 박병규 회장에게 협찬받았고 이 돈으로 이순석이 작품을 완성했다. 그런데 해태상만 세워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 기단공사를 마칠 무렵 해태제과 박 사장은 "좋은 날 술이 있어야 한다"며 해태에서 생산하는 포도주를 큰 독에 가득 담아 해태상의 기단 아래에 묻었다고 한다. 공식 기록은 없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다.
이명래와 이순석, 두 형제는 우리나라의 의약과 예술 분야에서 잊혀 질 수 없는 분들이다. 이제는 문화의 시대다. 우리도 먹고 입는데 몰두하던 수준에서 한 차원 높여 이런 선배들의 노력을 알고 전할 때가 됐다. 그런 의미에서 명래 한의원이 외형을 잃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 건물이 언제 사라질지 모를 일이지만 그 곳에 들러 이명래 선생이 만든 고약도 생각해보고 이순석 선생의 업적도 기릴 일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한이수 엔에프컨소시엄에이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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